우리사회 곳곳에서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 물질 만능의 풍토 속에서 편법과 불공정 그리고 차별을 정당화하며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이 인격과 교양을 갖추지 못해 꼰대라 불리고, 삶의 지혜와 경험을 전수하는 존재가 아닌 피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일까? 세상은 짙은 인품의 향기와 세월의 경륜으로 다음세대를 세우고, 위로와 배려가 있는 세상임을 알려줄 어른을 그리워하고 있다. 본지가 만난 한 어른은 소통의 부재가 어른을 어른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감독회장 시절 300만 전도 운동과 정직 운동을 펼쳤고, 은퇴 후 20년 가
아르바이트와 선교회 활동을 오가면서도 서울대 음대 전체 수석 졸업을 놓치지 않은 피아니스트 신미정의 신앙은 꿈보다 컸다. 15년간 주일 예배 반주를 단 한 번도 빠뜨린 적 없이 이어온 2009년 어느 날. 그가 선교사를 자원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클래식 피아노의 고장 오스트리아로 보내셨다.열여섯 피아니스트 박상욱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 최연소 입학했다. 이후 유럽 내 이름난 다양한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참가자로 화려한 수상 경력을 뽐내던 2010년, 유학을 중단해야 하는 위기를 맞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매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제29대 이철 감독회장이 취임했다. 지난 3일 서울 광화문 감리회관 16층 감독회장실에서 만난 이철 감독회장은 ‘소통’과 ‘경청’을 기반으로 향후 4년 간 감리회를 이끌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전임자가 지난 4년 간 임기 대부분을 소송으로 허비하다 은퇴한 상황이다 보니, 이철 감독회장은 “막중한 책임감에 부담이 크다”고 했다. 이미 10년 넘게 잃어버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감리회의 구성원 모두가 지쳐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라도 숨김없는 정확한 현실 분석을 바탕으로 공동체 내부의 충분한 대화와 합의의 노력
“선교사 지원 결정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뤄진 것인가?(Do you feel that your heart is moved by the Holy Spirit to take upon you the work of a foreign missionary?)”“그렇다. (I Do.)”- 캠벨 선교사의 미 남감리회 선교사 지원 문답 중 “캠벨 선교사가 죽기 전 날, 병상에서 한국인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았다. 캠벨 선교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오, 저는 한국인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나는 한국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며, 그들을
지난 8월 국내 신학 박사 23명이 약 5년에 걸쳐 ‘존 웨슬리 저널’(The Journal of the Rev. John Wesley, 1872)을 번역, 출간했다. 1735년 10월 14일부터 1790년 10월 24일까지 55년간의 복음사역을 기록한 존 웨슬리 목사의 저널 전집이다.지난 15일 서울 정동 달개비에서 만난 한국 감리회 대표 차세대 목회 지도자로 꼽히고 있는 서길원, 곽주환, 박동찬 목사는 ‘존 웨슬리 저널’을 읽다 보면 “복음전도자, 설교자, 신학자, 목회자, 교육자로서의 존 웨슬리 목사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미가엘선교합창단 단장 황청하 장로 “하북성에서 찬양연주회를 열기 위한 과정이었을까요?”중국 하북성에서 ‘한중 기독교성악음악회’를 개최하는 일에 가장 많은 기도와 헌신을 한 인물이 있다. 2010년부터 미가엘선교합창단을 이끌어온 단장 황청하 장로(제자교회)다.무역사업을 하는 황 장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지만, 삶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이제는 미가엘선교합창단을 위해 사업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였다.40여 명의 청년부와 1년간 연습해 시작했던 작은 합창단이었다. 이름도 없이 그저 좋아서 시작했던 합창단은 헨델의 ‘메시아’를 소화하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이후 황 장로는 마음 가운데 부어주신 은혜로 전문 선교합창단을 세웠다. 오로지 선교의 마음을 품고 16명의 단원으로 시작한 미가엘선교합창단은 전문 성악인 40여 명으로 구성된 전문 합창단으로 성장했다.“실력을 뽐내는 찬양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으로 찬양하는 진정한 미가엘선교합창단을 볼 때마다 선교는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닌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또 단원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됐죠. ‘신앙을 키워 개체교회로 되돌려 보내자’는 마음으로 합창단을 이끌어왔습니다. 신앙이 미약했던 단원들이 사모가 되고, 교회에서 섬기는 모습을 볼 땐 얼마나 감사한지요.”미가엘선교합창단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에 따라, 빛이 가는 곳마다 목소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자’는 사명으로 국내외 찬양으로 섬기고 있다.2012년 시진핑 체제 이후 중국은 기독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에 대한 감시와 감독, 탄압을 강화해왔다. 지난해 저장성(浙江) 정부 당국이 삼자교회(중국정부에서 인정한 공식 교회) 십자가를 강제 철거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중국 선교 현장은 열악했지만 황청하 단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로지 간절한 소망과 기도로 중국 하북성에서 ‘한중 기독교성악음악회’를 개최하기 위해 4년 전부터 준비했다. 연주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기도를 놓을 수 없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출국을 앞둔 상황에서도 정부의 허가가 나지 않아 연주회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벼랑 끝에 서기도 했다.“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해내신다는 것을 믿으니까요. 중국 정부가 미가엘선교합창단 연주회 허가를 해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게다가 유일하게 허가되었기 때문에, 교회 강단에서 연주회를 마치는 그 순간까지 우리 모두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답니다.”황청하 장로는 이번 연주회를 시작으로 좀 더 큰 비전을 품게 됐다.“중국교회에 전문 성악 교육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한중교회 간의 성악교육 교류를 꿈꿔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매년 여름과 겨울, 방학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캠프가 진행된다. 대부분 대형 교회 및 교단, 단체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모인다. 그렇지만 대부분 비슷한 강사진과 공연, 크게 다르지 않은 프로그램 등은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되 뜨거운 찬양과 안정된 시스템 등 대형교회의 장점은 살려 10년 가까이 특별한 캠프를 이어오고 있는 감리회 목회자들이 있다. “우리 캠프의 목적은 모이기 위함이 아닌 흩어지기 위함”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푸른비상 미니스트리 한철희 목사(복있는교회)와 최호 목사(초성교회)를 만났다. 지난달 31일 감리회 본부 앞에서 함께한 푸른비상 미니스트리 한철희 목사(오른쪽)와 최호 목사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대형교회 스텝 경험 바탕으로 캠프 시작대형캠프 장점 살리되 개체교회 중심으로푸른비상 청소년 캠프는 여느 캠프와는 달리 1년에 단 한 번 겨울에만 진행된다. 사역자들 모두가 개체교회를 담임하고 부교역자로 사역하는 이들이기에 여름과 겨울, 그리고 몇 차에 걸쳐 캠프를 진행하기에는 현실적인 여력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크지 않은 개체교회 목회자와 부교역자가 힘을 합쳐 매년 300명이 모이는 청소년 캠프를 연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교회와 사역을 챙기기에도 바쁜 이들이 어떻게 캠프를 시작하게 된 것일까?현재 푸른비상 미니스트리(대표 한철희 목사, 이하 푸른비상)에서 함께하는 세 명의 목회자들은 과거 한 교회에서 근무하며 캠프에서 예배와 찬양, 행정을 담당했다. 이후 개척과 부교역자로 각자의 사역을 찾아 흩어졌고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캠프 스텝으로 함께한 즐거웠던 경험을 나누며 청소년들을 향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누군가 장난처럼 “우리끼리 캠프 한 번 만들어볼까?”라고 던진 질문이 현실이 돼 “이왕 하는 거 남들과는 다르게 하자! 의미 있게 해보자!”고 다짐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이들이 과거 대형캠프에 참여하며 느꼈던 아쉬운 점은 유명 강사진에 인기 연예인, 찬양팀이 나와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는 하지만 정작 그때뿐이라는 것이다. 캠프의 목적은 변화된 아이들이 자신의 교회로 돌아가 그곳에서 믿음생활을 잘 이어나가도록 돕는 것인데, 대형캠프는 개체교회로의 연결이 부족한 부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캠프에 함께 참석하는 선생님들의 역할이 고작해야 간식을 사주고 인원을 점검하고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데 그치다보니 정작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해나갈 교회 선생님들과의 교제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그래서 푸른비상이 고안한 것은 대형캠프가 준비하는 만큼 시스템적으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되 프로그램은 마치 각 교회가 자체 수련회를 온 것처럼 꾸며보자는 것이었다.“우리 캠프에 참가하려면 교회별로 소그룹을 구성해 와야 합니다. 대부분의 대형캠프가 놓치고 있는 선생님과 아이들과의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죠.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고 간다고 해도 우리 이야기, 우리 교회의 이야기가 없다면 돌아가서 함께 나눌 추억도, 믿음의 동료도 만들기 어렵지 않을까요?”(한철희 목사)이 때문에 푸른비상 청소년 캠프에서는 모든 순서를 진행할 때 교회별로 자리를 배치한다. 또한 소그룹을 통해서는 각 교회끼리 선생님과 아이들이 말씀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결단하도록 돕는다. 일정 중에는 교회가 직접 프로그램을 준비해와 따로 진행하는 시간도 있다. 모든 시간이 개체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동일한 주제로 이어지는 만큼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블록처럼 맞춰지는 듯한 모습이다. 푸른비상 청소년 캠프는 여느 대형캠프와는 달리 소그룹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교회별 교제를 돕는다는 특징이 있다. “캠프는 교육·교제·하나님 만남의 기회”아이들 관심보다 필요에 따라 주제 선정푸른비상은 지난 캠프를 지나오며 십자가 복음, 영적 전쟁, 환골탈태 등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을 다뤘다. 내년 역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보는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캠프가 예정돼 있다. 이에 대해 한 목사는 할 수 있는 ‘강사 중심’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필요한, 반드시 전해야 하는 주제를 먼저 세우고 강사를 섭외하자는 게 처음부터 지속된 확고한 방침이라고 말했다. 주 강사는 푸른비상 목회자들이 직접 맡기도 하고 주제에 특화된 강사를 찾기도 한다. 감리회 목회자들끼리 모였지만 주제에만 맞는다면 교단과 상관없이 강사를 초빙한다.“여러 명의 강사가 와서 한 시간씩 강의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주제로 강사 한 명이 강의를 이어가다보니 교육의 효과는 훨씬 뛰어나요. 캠프에 머무는 2박 3일은 약 40시간 정도가 되는데 청소년들이 매주 교회에서 보통 1시간가량을 머문다고 하면 40주를 한 번에 모이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이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는 것이죠.”(한철희 목사)“캠프는 행사가 아닌 기회라고 생각해요.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 교제의 기회,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예요. 결국 필요한 내용을 알차게 준비해서 아이들이 부족한 신앙을 채워가고 그 안에서 뒹구는 교제를 갖고 하나님을 진하게 만나는 자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최호 목사)이러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푸른비상 청소년캠프는 재참여율이 높다. 4번 이상 참석한 교회도 있을 정도다. 시스템적으로는 타 대형캠프에 비해 부족한 게 사실이고 광고를 진행하기에도 재정적 부담이 상당해 SNS 외에는 별다른 홍보활동도 없지만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교회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한 번 다녀간 아이들이 다시 오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감사해요. 우리가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이곳에서 정말 하나님을 만나서라고 믿고 싶어요.”(한철희 목사)사실 캠프를 지속하면서 푸른비상이 재정적으로 얻는 수익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적자일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캠프 사역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청소년들을 만나는 기쁨이 물질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다음세대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자체가 기쁨이라는 이들. 앞으로도 ‘무엇을 할까, 재미있을까’가 아니라 ‘뭐가 필요할까, 뭘 전해줘야만 하나’에만 관심을 갖고 고민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내년 겨울에도 역시 1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엔케렘 대부도 수양관에서 캠프가 진행된다.“사실 저희는 큰 변화는 원하지 않아요. 캠프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뀌기는 드문 일이니까요.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돼서 삶 가운데 거짓말을 많이 하던 아이들이 거짓말 좀 덜하고, 하나님을 모르던 아이들이 하나님을 조금 느끼고, 아무렇지 않게 교회에 늦던 아이들이 뛰어가는 것부터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어요.”(최호 목사)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 속에 위축된 한국교회. 세상으로부터 쏟아지는 질책과 비난은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사명마저도 흔들리게 만든다. 의지를 상실한 채 무너져가는 안타까운 한국교회 현실을 향해 “다시 시작해보자!”고 독려하는 책이 출간됐다. 서길원 목사가 지난해 본지에 연재한 ‘Church Restart’를 묶어 신간 ‘Restart의 원리로 미래를 여는 교회’로 펴냈다. 30년 목회 경험 바탕 ‘목회 원리’ 제시‘Restart의 원리로 미래를 여는 교회’는 서길원 목사(상계교회)가 지난 한 해 본지 목회 면에 연재한 ‘Church Restart’ 코너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변치 않고 지켜 나가야 할 지침들을 제시한다.서두에서는 리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목회자가 믿음의 변화와 영적 성장을 통해 영적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 △전도와 심방, 양육과 소그룹 등 ‘영혼 구원’의 원리 △예배와 설교, 기도, 비전 설정 등 ‘부흥’의 원리 △교회학교 사역 등 ‘다음세대 사역’의 원리 등 목회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 30년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한다.결국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막막한 사역의 현장에서 미래를 열기 위해 ‘비전을 세우는 지도자’, ‘인격을 갖춘 지도자’, ‘전문성을 지닌 지도자’가 되라는 것이다.서 목사는 “리더는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다.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분명 아니”라며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에게도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내가 있으므로 우리 교회가 좋아지고 거룩한 영향력이 나타나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품으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최근 목회자들의 사생활 문제가 잇따라 부각되고 있는 데 대해 철저한 인격관리는 필수다. 그는 “리더의 인격이 잘 갖춰지지 않으면 다 새어 나간다. 거룩성의 문제”라며 “목회자들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서 목사는 목회자로서 자리 지키기에 급급하거나 월급쟁이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비전 설정’이 중요하다고 피력한다. 교회가 나가야 할 비전은 결국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이인데, 목회자는 그것을 찾아 바르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비전의 정석은 △남들이 비웃을 정도로 크게 △교회의 본질에 맞게 △목회자의 은사에 맞게 △상황을 고려해 비전을 세움으로써 현실화되게 하는 것이다.그러나 비전 제시만으로 목회자의 역할은 끝나지 않는다. 비전을 제시했다면 다음 단계는 훈련이다. 설교와 양육을 통해 평신도 리더를 길러내는 작업이다. 서 목사는 “고착화된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도들도 함께해야 한다”면서 “단순히 성장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섬기고, 다음세대를 섬기고, 민족을 섬긴다는 선교적 목표를 세워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마음으로 다시 뛰는 한국교회 소망”그는 이 책을 목회자 외에도 목회자와 함께 체계적·균형감 있게 교회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는 평신도 리더들과 성도들에게도 추천했다. 이론보다는 실천적인 면을 강조해 쓴 만큼 현장에서 함께 나누며 적용해나간다면 목회자와 평신도가 같은 비전을 공유하기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서 목사는 특별히 감리회 목회자로서 감리교회가 든든한 기초와 조직, 신학을 갖추고 있음에도 미래를 향한 비전이 부족한 현실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지성과 영성을 겸비하고 실천력까지 갖췄던 존 웨슬리 목사의 신앙을 이어받은 후예로서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그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마치 너무 힘들어서 움츠려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 책을 통해서 마음을 합치고 싶었고 다시 뛰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했다”며 “그렇지만 다시 뛰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고 원리가 필요하다. 나름대로 각 분야에서 다양한 사역에 뛰어든 경험을 바탕으로 감히 ‘목회의 원리는 이것’이라고 말하는 책”이라고 소개했다.이어 “원리라는 것은 성경적 목회관에 시대적 옷을 입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 제목에도 ‘미래를 연다’는 표현을 사용했다”면서 독자들을 향해 한 마디를 남겼다.“한국교회여, 힘 좀 써봅시다. 미래를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가 살아나면 이 시대에도 한국교회는 반드시 됩니다!”
하늘샘교회가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울릉도 동산교회로 이색 여름선교를 다녀왔다. 사진은 울릉도 주민들을 초청해 함께 한 DJ 진호의 디제잉 파티 현장이다. 작지만 아름다운 섬, 누구나 갈 수 있지만 날씨의 영향으로 아무 때나 쉽게 갈 수 없는 섬. 울릉도에 하늘샘교회 45명의 성도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풍랑주의보 발령에도 불구하고 궂은 날씨에 맞서며 살아있는 신앙, 살아있는 교회가 되고자 ‘울릉도 선교행’을 과감히 택했다.출발부터 불가능을 ‘가능’으로 역전하늘샘교회(전웅제 목사)는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울릉도 동산교회(조성태 목사)로 전교인 선교를 다녀왔다. 우연히 조성태 목사와 통화를 하다 “울릉도에 한 번 와 달라”는 농담 반, 진담 반섞인 농담이 ‘하늘샘교회 전교인 선교’가 됐다.처음에는 울릉도 지역의 청소년들과 하늘샘교회의 청소년들이 방학기간 함께 여름을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 청소년 선교활동을 기획했다. 그런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울릉도 선교를 가보겠느냐”며 “함께 울릉도에 가고 싶다”는 성도들의 의견에 4살짜리 어린 아이부터 환갑이 넘는 장년층까지, 총 45명의 성도가 함께 움직이는 대형 프로젝트가 됐다.생각만큼 선교를 준비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먼저 재정에 부딪혔다. 울릉도로 들어가고 나오는 배 삯만 해도 1000만 원이 넘었다. 하지만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전웅제 목사는 “선교 준비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놀라울 정도로 일하셨다”며 “부족한 재정은 여러 곳의 손길로 채워졌다”고 감사 고백을 전했다.청년들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아이들은 선교 비용을 보태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또 청년들은 멀고 외진 섬에 가는 것이 위험하다며 울릉도 선교를 허락하지 않았던 부모님을 눈물로 설득하기까지 했다.겨우 선교 준비가 마쳤을 쯤에는 날씨가 말썽이었다. 울릉도로 향하는 배를 타기 전날, 풍랑주의보가 내려져 모든 배가 결항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성경 속에서 ‘파도야 잠잠하라’(막 4:39)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한 마디로 바다가 고요해졌듯, 하늘샘교회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을까. 기적처럼 출발 직전 풍랑주의보가 해제되어 하늘샘교회는 일정대로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하지만 배에 올라타자마자 배는 롤러코스터처럼 출렁거렸고, 성도들은 4시간 동안 소리를 지르며 배 멀미에 시달렸다. 이 시간을 모두 견디고 울릉도에 발을 내딛자 성도들은 하나같이 “선교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무서운 바다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더 붙잡게 됐다”고 말했다. 하늘샘교회가 울릉도 주민들을 초청하기 위해 버스킹 전도와 야시장을 진행했다. 사진은 야시장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DJ 진호와 함께 한 ‘디제잉 워십’육지 교인들이 울릉도에 가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보통 울릉도선교라 한다면, 낙후된 시설을 보수공사 해주는 일이나 지역 어르신들의 일손을 돕는 일이 대부분이다. 전웅제 목사는 고민했다. ‘하늘샘교회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나님을 전하면 좋을까.’ 그러던 중 디제잉 예배인도자 DJ 진호에게 도움을 청했다.울릉도에 가기 전부터 호응은 대단했다. 하늘샘교회는 첫째 날과 둘째 날 저녁예배를 CCM 디제잉 워십으로 진행했다. DJ 진호의 인도 아래, 클럽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네온사인과 빵빵한 사운드, 그리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무척이나 신났던 EDM 찬양이 예배당에 울려 퍼졌다.빠 빠빠 빠빠빠. 익숙하지 않은 찬양 멜로디에 처음에는 성도들 모두가 쭈뼛쭈뼛 찬양을 불렀지만, 점차 열기는 고조됐다. 곧바로 모든 성도는 하나되어 뛰기 시작했다. “예! 주 찬양” “소리 질러” 등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몸을 흔들고 소리를 외치며 함께 찬양을 불렀다. 디제잉 워십은 마치 퇴폐적인 클럽 분위기일 것 같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모두 함께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었다.둘째 날, 하늘샘교회는 본격적인 디제잉 파티를 위해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전 날 동산교회 청소년들을 위해 진행된 예배와 달리, 이튿날에는 울릉도 주민들을 교회에 초청하고자 했다. 하늘샘교회 청소년들은 핫도그, 떡볶이 등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울릉도 특산물 판매장을 찾아 버스킹 공연을 여는 등 저녁에 있을 디제잉 파티 전도지를 주민들에게 나눠줬다.직접 만든 음식으로 교회 마당에서는 야시장이 열렸다. 예배당 안에서는 흥겨운 찬양소리가 새어나왔다.소문을 듣고 찾아온 울릉도 주민들과 청소년들은 함께 뛰고 먹고 외치며 디제잉 파티에 함께했다. 전웅제 목사는 “주민들이 경건할 것만 같았던 교회에서 EDM 찬양이 흘러나와 깜짝 놀라했다. 그리고 함께 재밌게 춤을 췄다. 울릉도 주민들과 하늘샘교회 성도들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이날 동산교회를 처음으로 찾은 울릉도민도 많았다. 울릉도 청소년 12명과 어른 3명, 총 15명의 울릉도 주민이 동산교회를 찾았다. 특히 교회를 처음 온 청소년은 6명이었다. 전웅제 목사는 “울릉도에 청소년이 100여 명 있지만 방학기간이면 섬에 남아있는 청소년들이 30명도 채 되지 않는다”며 “찾아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산꼭대기에 있는 동산교회에 청소년이 12명이나 올라온 것은 기적”이라며 벅찬 마음을 표현했다.또 “이번 선교를 계기로 동산교회가 울릉도의 다음세대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교회로 소문이 났다”며 “초신자들도 디제잉 워십을 통해 교회에 대한 인식이 전환됐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울릉도 뿐만 아니라 지역 특성상 폐쇄적이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섬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많은 목회자, 선교사들은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다. 하늘샘교회가 디제잉 워십을 접목한 선교활동을 준비할 때 부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해냈다.전웅제 목사는 “이번 울릉도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이자 기적이다.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다시 한 번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전했다.“EDM도 찬양될 수 있죠”…디제잉 예배자 DJ 진호 클럽이 연상되는 ‘EDM’ 음악이 교회에도 어울릴까. DJ 진호는 ‘디제잉 워십’으로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EDM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DJ 진호는 신학대학교 졸업 후 목회를 하다가 2014년 본격적으로 디제잉 워십을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주 발 앞에 나 엎드려’, ‘주의 자비가 내려와’,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등의 복음성가를 편곡해 디제잉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예배와 적합하지 않다”며 비난하기도 했지만, DJ 진호는 “찬양을 두고 장르 논쟁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며 기독교와 비기독교인 상관없이 누구나 찬양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EDM 찬양을 작업하고 있다.특히 DJ 진호의 디제잉 워십은 전도축제와 같은 자리에서 초신자들이 교회에 익숙해지는 도구로 자리잡고 있다. 예배 뿐만 아니라 전방위 선교사역까지 활용되고 있다.이번 하늘샘교회와 함께 울릉도 선교를 성황리에 마치고 돌아온 DJ 진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울릉도 주민들이 디제잉 워십과 디제잉을 통해 교회 문턱을 넘어서는 것을 경험했다”며 “이 이유 때문에 디제잉 워십을 계속 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또 “울릉도를 시작으로 디제잉 워십이 필요하고 디제잉 워십을 드리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선교 이튿날 울릉도 주민과 함께한 디제잉 파티 현장 모습이다. 하늘샘교회와 동산교회 성도들이 선교 여정을 마치고 찍은 단체사진.
이나리 씨는 지난 제59회 마지막 사법고시에서 '5전 6기' 끝에 합격했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다시 기회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준비하여 큰 기쁨을 맛보았다. 그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경험한 그녀는 새해를 맞아 어려움 속에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꿈을 위해 나아가라"고 말한다. 2018년 새해를 맞으며 모든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싶은 이나리 씨는 지난 해 11월 7일을 잊을 수 없다. 그해 6월, 제59회 마지막 사법고시 2차 시험을 봤던 그녀는 이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여섯 번째 기다림이었는데, 이날은 좀 달랐다. 다니고 있는 삼덕교회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사실, 많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로스쿨제도가 도입되어 이제 영원히 사라지게 된 사법고시는 지난 1963년 처음 치러진 이래 2만 766명이 합격했고, 68만 7510명이 떨어졌다. 그 동안 사법고시를 공부했던 고시생들은 이번 제59회가 마지막 기회였다. 모두 1차 합격자들인 이들은 여기서 떨어지면 사법고시의 기회는 다시없었다. ‘5전 6기’의 도전과 응답떨리는 마음으로 발표를 기다리던 그녀는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 중에 휴대폰이 소란해졌다.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전화도 이어졌다. 가족과 지인들이 합격자 명단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고 축하 전화와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지난 번 제58회 고시 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때 떨어졌는데, 동명이인이 붙는 바람에 엉뚱한 축하 전화를 받아야 했다. ‘드디어 끝났구나’라고 축하해주는 분들에게, ‘아직 안 끝났다’고 말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진짜였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감사한 분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만큼 긴 여정이었다.중앙대학교 법대 04학번인 그녀는 시험 자격이 되었던 3학년 때 처음 고시를 봤다. 처음 본 시험에서 덜컥 1차에 합격했다. 가장 어려운 1차 관문을 한 번에 통과하자 “나이스”하면서 2차 시험을 봤지만 결과는 탈락.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며 계속 도전한 고시는 그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보통 네 번째에서 제일 많이 붙어요. 이때가 합격률이 가장 높죠. 그런데 그때도 총점은 좋았는데 한 과목이 안 되서 또 떨어졌어요. 그때 좀 절망했어요.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는 거 아닌가, 내 능력의 한계를 느낀 거죠. 많이 지치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만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법서를 보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다시는 법서를 보지 않겠다며 학교로 돌아가 취직준비를 했다. 그러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고민이 깊어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었던 꿈이었다. 그나마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도 법학뿐이었다.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로스쿨로 가면 어떨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교수님과 선배들의 조언은 끝까지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도전한 58회 고시, 그러나 또 2차에서 안됐다. 며칠을 눈물 속에서 살았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는 말씀을 좋아한다는 나리 씨가 그동안 공부했던 곳, 정이 많이 들었다. 할 만큼 했는데도 안 된다면그때 어머니 정선월 권사가 준 신앙적 충고를 잊지 못한다. “네가 그렇게 할 만큼 했는데도 안 되는 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니?” 그러고 보니까 모태신앙으로 30년 넘게 교회를 다녔지만 성경 한번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생명의 삶’ 큐티 책은 늘 새 책으로만 꽂혀 있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바쁜 시간을 쪼개 큐티 시간을 가졌다. 밑줄도 그어가며 말씀을 의지했다.“이번 마지막 시험은 더욱 절실한 만큼 불안할 수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안정된 이유는 ‘하나님, 이번엔 나 조금 했잖아요, 큐티도 하고요’, 하는 마음이 있었죠. 또 엄마를 통해서 교회 목사님과 교우님들께서 정말 저보다 더 열심히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다는 걸 알고 큰 힘이 됐죠.”마지막 사법고시 시험장은 긴장감이 팽팽했다. 모든 고시생이 1차 시험 합격자들로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로스쿨을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든지, 아니면 전혀 다른 진로를 선택해야 했다. 그녀 앞에서 시험 보던 사람은 경련을 일으켜 119가 오기도 했다.“그분을 보면서 기도 제목이 바뀌었어요. 앞에 계신 분이 아프지 않고 끝까지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죠. 시험 끝나고는 학교에서 하는 성경일독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현재 사도행전을 읽고 있고요, 주일날엔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해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사복음서라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말씀을 읽고 공부하며 기도로 기다린 11월 7일 발표 날, 드디어 합격의 소식을 받았다. 한 언론사로부터 합격 수기를 부탁받았는데, 쓰다 보니 감사한 분들 내용과 명단만 3페이지가 넘었다. 모두들 자기가 합격된 것처럼 기뻐해주었다. 학교와 교회에는 현수막이 붙었다. 그녀를 위해 기도해준 교우들은 되레 “붙어줘서 고맙다”고 반가워했다. 무엇보다 감사한 분은 엄마.“신림동에 있을 때, 엄마가 늘 오셔서 빨래 청소 다 해주시고, 음식과 몸에 좋은 것들을 늘 냉장고에 채워주셨죠. 퇴직하시기 전에는 학교도 늘 차로 태워다 주셨어요. 그땐 고마운 줄도 몰랐죠. 요즘 2월 졸업에 필요한 계절학기 한 과목을 들으러 학교를 버스타고 오는데, 힘들 때가 많더라고요.”동생 미리를 비롯한 가족 친척 식구들, 교회 목사님과 교우들, 학교 교수님과 선후배들, 두루두루 모두 고마운 분들이다. 여섯 번의 도전 속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분들이 용기와 지혜로, 무엇보다 기도로 일으켜주었다. 지금 돌아보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나 그때는 참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나이보다 훨씬 동안인 나리 씨는 엄마(오른쪽)와 동생(왼쪽)에게 긍정 에너지를 많이 받아서라고 한다. 지금 계절학기에서 한 과목을 수강하면 이제 2월에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고시를 처음 보고 1차에 떨어지면 아예 로스쿨로 옮기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1차에 합격하면서 재학 중에 고시에 붙겠구나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러나 번번이 2차에서 떨어졌다. 희망은 점점 원망으로 탈색되어갔다. ‘차라리 1차부터 안됐다면 일찍 손 털고 나갔을 텐데,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의문은 깊어갔다. 이젠 답을 얻었을까?“처음에 시험 봐서 1차에 붙었을 때부터 제 공부 방법을 믿었어요. 남의 조언도 잘 안 받았죠. 계속 떨어지면서도 내 방법만 고집했죠. 그런데 이번엔 주변의 말을 많이 들었어요. 또, 그전까진 내 능력만 믿었죠. 그만큼 신앙생활은 뒤로 미뤘어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내 지식, 내 능력을 많이 쌓으면, 나만 잘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그게 착각이었다. 말도 안 되는 부분에서 무너지게 하셨다. 지금 돌아보니 여기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었다. 그녀를 더욱 키우시려는 그분의 섭리. 만약 쉽게 합격했더라면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도,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서툴렀을 거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이걸 안다. 나리 씨가 이 시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한 가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확실해지면 계속 안 된다는 느낌이 들어도 옆을 쳐다보지 마세요. 그러면 시간만 더 허비하게 되요. 포기하지 마세요. 나 혼자만 하려고 하면 나의 한계로 끝나더라고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내가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잖아요. 그 부분을 하나님이 채워주신다고 믿으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양금석 고려청자 명인은 목회자가 되어 교회가 없던 충북 옥천의 오지에 있는 월외리에 예인교회를 세우고 도자기 제작을 가르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뤄왔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이 차가운 칼바람에 떠밀려 종종걸음을 치고 있다. 대롱대롱 매달린 처마 끝의 고드름처럼 세밑을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심한 듯 착잡하다. 지나온 한 해의 발걸음들을 뒤돌아보면 웃음보다는 눈물이,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항상 더 많아 보이는 연말의 풍경.그러나 송구영신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은 어제의 절망보다는 내일의 소망을 품고 나아가야할 이유가 있다. 이것이 고려청자 명인인 양금석 목사(예인교회)가 도자기를 만들 때마다 공감되는 ‘토기장이’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하다.“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사야 64장 8절)이라는 성경구절처럼, 어제의 나의 고난과 실패마저도 그분은 내일의 더 나은 그릇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도자기에 담겨진 삶과 믿음“도자기 하나가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원토를 반죽해서 원하는 모양을 빚어 어느 정도 건조시킨 후에 원하는 문양을 넣고 색을 넣어 900도 불가마 속에서 초벌구이를 합니다. 그 후에 유약을 칠해서 더욱 센 1300도 불 속에 넣죠. 그 과정에서 파손된 것도 있고 잘못된 건 깨뜨리기도 합니다. 그 모든 걸 다 견뎌낸 놈들이 작품이 되는 거죠. 이 모든 과정에서 토기장이는 정말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대한다는 겁니다.”이 모든 과정이 도자기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 토기장이의 손에서 주물러지고 문양이 만들어지고 색이 입혀지고 뜨거운 불속에 들어가는 모든 과정들이 도자기에게는 고난이지만 그걸 견디면 조물주의 마음에 합한 작품이 된다. 양 목사는 자기의 인생도 돌아보면, 이렇듯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고 회상한다.그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인천 주안동은 왜정시대부터 도자기 공장이 많았던 곳이었다. 변변한 오락기구나 놀이터도 없던 그 시절에 도자기 공장은 훌륭한 놀이터였다. 거기 가면 못 쓰는 도자기들, 깨진 파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걸 가지고 놀던 어린 양금석은 자연스럽게 도자기의 길로 들어선다.“중학교 때로 기억됩니다. 그 도자기 공장들 중에서 전통도자기 고려청자를 재현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제 스승인 변산 위군섭 청자 명인이 그런 분이셨죠. 그분 밑에서 심부름을 하며 도자기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됐죠.”어렸을 적부터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했던 그는 이곳에서도 성실한 태도로 일하면서 교수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 덕에 1968년, 당시 한양공대 요업과에 독일 원조를 받아 도자기를 만드는 최첨단 도자기 요업연구소가 생겨났을 때, 그도 연구원으로 따라 갈 수 있었다.“거기서 도자기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온 후에는 경기도 벽제에 ‘석산도예’라는 이름으로 창업을 했죠. 그러면서 한편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돈 버는 일은 돈 버는 일이죠. 그것으로 채울 수 없는 어떤 영적 갈증이 있었거든요.” 하나의 도자기가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이 도자기에게는 고난일 수 있지만 만드는 이는 정성과 사랑을 쏟는 시간이다. 세상에 하찮은 그릇이란 없다. 사람도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모두 하나님의 귀한 작품이다. 시골 오지에 ‘도자기 교회’ 설립뛰어난 고려청자 명인으로 소문이 나면서 그의 도자기들은 고려청자를 좋아하는 일본의 유명 백화점 등에 많이 수출되고 작품 전시회도 가지면서 명성과 재물을 얻기도 했다. 우리나라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일본인 부인인 이방자 여사가 그의 도자기를 애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이 모든 걸 다 내려놓는다.“도예점 문을 닫고 이곳 충북 옥천군 안내면 월외리로 내려왔습니다. 여긴 옥천에서도 아주 오지에 속합니다. 양쪽이 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마을에 사람도 3, 40세대 밖에 살지 않는 곳이죠. 자연경관도 좋고, 무엇보다 이곳에 교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내려왔죠.”예인교회를 세웠지만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들 집안 간이라, 제사 문제 때문에 쉽게 교회 나올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달란트인 도자기 제작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교회에 예배당과 별도로 도자기 굽는 시설, 강의 장소 등을 마련했다.“읍내 군청소재지에 광고를 해서 사람들이 저희 교회에 와서 도자기 강의를 듣고 제작하는 일을 시작했죠. 공무원들이 와서 배우면서, 지역문화예술 프로그램으로 지원을 받아 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더라고요. 그래서 매년 일 년 과정으로 사람들이 저희 월외리 예인교회로 와서 일주일에 한번 씩 도자기를 굽고 배우고 하는 프로그램을 했습니다.”자연스럽게 서울 등지에서 귀촌 귀농한 이들이 그를 찾아왔다. 함께 도자기를 만들고 예배를 드리는 신앙공동체로 발전하게 됐다. 그에게 도자기를 배운 사람들 중에서 미술대회에 나가 입상도 하고 초대작가로 나서는 이들도 생겨났다. 어떤 이들은 아예 도심에 공방을 만들어 개업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교회 하나 없던 오지에 세워진 예인교회는 은은하게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고 있다.“벌써 여기 온지 20년이 됐네요. 사실 시골은 목회하기에 열악하죠. 교인도 적고 재정적으로도 어렵습니다. 교회 헌금도 작지만 제 생활비로 쓴 적이 없어요. 돈 벌러 여기 온 게 아니니까요. 저는 큰 목회자가 될 수 없는 그릇입니다. 작은 목회자입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인 이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작은 그릇의 역할을 잘하고 싶었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일이 신앙 수련과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신앙적 영감이 들어간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 늘 곁에 두고 보는 즐거움이 있다. 도자기 만들며 맘도 다스려그의 고백은 성경 디모데후서 2장 21절과 닿아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그는 그릇을 만들면서 이 말씀을 피부로 느낀다. 모든 그릇이 다 소중하다. 큰 그릇만 필요한 게 아니다. 밥상 위에 국 담을 큰 그릇도 있어야 하고, 찜을 놓을 더 큰 그릇도 필요하지만, 그걸 찍어먹을 작은 그릇도 요긴하게 쓰인다. 세상에 하찮은 그릇이란 없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작은 그릇이 되고 싶었다.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신앙 수련과 인격 수양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성경적인 비유가 많아서 기독교인에게는 신앙 성숙을 위한 좋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양 목사는 앞으로도 주님이 주신 이 은사를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 한다.“도자기를 만들면서 나중에 본인들이 스스로 평가를 합니다. 자기 성품이 많이 변했다고요. 예전엔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는 성품이 못됐는데, 도자기 만들면서 인내심이 생겼고요, 성향이 좋은 쪽으로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여자 분들이 주로 배우게 되는데, 남편들이 처음엔 무시하다가 나중에 작품을 보고 놀라요. 나중엔 남편들이 더 좋아해서, 같이 와서 보고, 교회 에 대해서도 점점 더 마음을 여는 것 같습니다.”한 해를 보내면서 나를 빚으시는 ‘토기장이’ 하나님의 손을 본다. 똑같은 고려청자라도 색이 똑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사람도 그러하다. 남모르는 나의 진한 눈물과 깊은 한숨을 가지고 그분은 나만의 신비한 비취빛깔을 만드신다. 새해에도 그분의 손길을 더욱 의지하며 내 인생을 맡길 뿐이다.
31사단 신우들은 최근 교통사고 현장에서 민간인들의 인명을 구조한 일로 표창을 받았다. 이들은 특히 교회의 일꾼으로 이날도 성경공부와 주일준비를 마친 후에 일어난 일이라 더욱 뜻깊다. 사진에 없는 병사까지 포함해서 10명의 신우들을 소개한다. 교통 통제를 맡은 상병 한우림, 상병 윤승주, 상병 염기호, 일병 조성민, 그리고 부상자들을 돌본 병장 이예닮, 상병 노한별, 상병 김경섭, 상병 유남규, 일병 이동원, 일병 이윤재. 이들을 지도하는 군종목사 손준철 소령. 올해 크리스마스는 이들에게 더욱 의미있는 시간으로 다가오고 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31사단 신우들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다. ‘신우’란 전우들 중에서 믿음을 가진 군인들이 서로 부르는 말이다. 31사단 신우들 10명이 최근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급했던 민간인들을 구조한 일이 소방서를 통해 부대로 알려져 표창을 받았다.이들은 31사단 군인교회인 삼일교회의 군인 교인들로서 늘 토요일이면 오전에 모여 군종 목사인 손준철 소령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주일준비를 하는 ‘교회의 일꾼’들이다. 그날도 토요일 아침부터 모여 성경공부와 주일준비를 마치고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됐다. 손 중령은 칼국수를 먹자며 신우들을 데리고 나갔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인명구조“보통은 교회에서 집사님이나 권사님이 해주시는 밥을 먹는데 그날은 칼국수를 먹으러 갔어요. 그게 참 신기한 일이죠. 만일 교회에서 점심을 먹었더라면 그런 사고 현장을 맞닥뜨리지 않았을 텐데요.”점심을 먹고 귀가하는데 평소에 막히지 않던 길이 막혔다. 옆길로 나가 보니 교통사고가 나서 혼란한 상황이었다. 모하비 차량과 오토바이가 충돌했는데, 차량 안에 있는 사람들은 크게 다친 데가 없어 보였으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오토바이에 탔던 고등학생 3명은 큰 충격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져 쓰러져있었다. 이들은 헬멧도 쓰지 않은 상태라 부상이 심각했다.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 벗겨져 있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특히 한 명은 의식이 거의 없는 위급한 형편이었다.“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만 있을 뿐 그때까지도 아무도 119에 신고조차 하지 않은 겁니다. 부상자들은 길에 그대로 쓰러져있고 차들은 서로 엉켜서 가지 못하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119에 연락하는 걸 돕고, 저희 신우 네 명은 차량을 통제하게 했어요. 조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요. 그리고 여섯 명은 부상자들을 돌봤습니다.”이 중에서 노한별 상병은 의식을 잃고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학생에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그러자 피를 토하고 숨을 쉬어 위기를 넘겼다. 피가 기도를 막아서 호흡이 곤란했고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던 상태였다.119가 도착하기 전까지 5분 여 동안 심폐소생술을 하며 부상자들을 잘 돌본 덕분에 이들은 모두 무사히 회복될 수 있었다. 심폐소생술로 생명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한 노한별 상병은 그날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위급한 상황이라 처음 부상자들을 봤을 때는 긴장도 됐는데 부대에서 배운 구급법을 떠올리며 심폐소생술을 했습니다. 다른 신우들과 함께 호흡이 잘 맞아서 무사히 생명을 구하고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환자들이 빨리 회복됐으면 좋겠네요.” 이번 교통사고 현장에서 침착하게 부상자들을 돌보고 더큰 사고가 나지 않도록 현장을 잘 통제한 이들은 평소에 교회에서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교회 봉사를 하면서 다져진 팀워크를 그대로 발휘했다고 한다. 군대 와서 깊어지고 다져진 믿음손 소령은 “우리 신우들이 아니었으면 그 부상자는 죽을 수도 있었다”면서 “하나님이 예비시켜주셨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그날 일을 되짚었다.“그때 저희가 사고현장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아무 것도 수습되지 못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우리 신우들이 침착하게 대처를 잘했습니다. 평소에 함께 성경공부하고 교회 봉사를 하면서 다져진 팀워크로 생명을 구조한 것 같아요. 성경공부하면서 사랑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배웠는데, 모두 함께 그대로 실천하게 된 거죠. 믿음과 행함이 팀플레이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며 제가 뿌듯했습니다. 평소에도 교회에서 가장 열심히 봉사하고 사역하는 신우들이거든요. 저희는 그날 그렇게 119가 올 때까지 현장을 수습하고 조용히 떠나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요.”그 다음 주 월요일 소방서에서 부대로 연락이 왔다. 군인들이 인명구조의 중요한 골든타임을 잘 대처해줘서 부상자들을 구조하게 됐으니 용감한 시민상을 추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이들이 선행이 알려지면서 부대로부터 표창을 받게 된 믿음의 전우들이 손 소령은 더욱 자랑스럽다. 이번 일로 군대에 와서 신앙심이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가는 기독 청년들을 모범을 그대로 본 것 같기 때문이다.“저는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사랑해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오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군대에서 청년들이 인생의 어려움과 한계를 겪으면서 자연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교회 가본 적이 없는 친구들이 군대에서 처음 교회에 나오고요, 밖에서 신앙생활을 대충 했던 친구들이 군대 와서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걸 봅니다.”얼마 전에 한 신우는 아버지가 위독해서 청원 휴가를 받아 나갔다. 신앙이 없던 아버지를 병상에서 영접기도까지 드리게 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르고 돌아왔다. 슬픔이 아니라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온 그 병사는 기회가 되면 간증을 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어떤 분들은 군대에서 세례 주는 걸 무슨 기계가 찍듯이 주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 집중교육을 받고 희망하는 병사들에게 세례를 주기 때문에 밖에서 받는 세례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례 받은 후에 자대배치를 받고 교회를 열심히 안 나갈 수도 있지만 그들이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죽어가던 생명을 살린 이들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절이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고 한다. 민간교회가 군인교회들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점점 줄어드는 남자, 청년들이 군대에서 더욱 주님을 영접하고 믿음이 성숙하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민간교회와 함께 하는 성탄절 되길한국교회에서 점점 줄어가는 세대가 청년이고 그중에서도 남자들이라는 현실을 염두에 둔다면 군대에서 교회를 접하고 신앙을 갖고 세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그 어떤 선교보다도 민간교회가 관심을 갖고 협력해야할 선교대상으로 보인다.손 소령은 종종 민간교회에 협력을 요청하면 ‘우리는 해외선교 때문에 도울 수 없다’고 하는데, “우리 집안 식구도 못 지키는데 남의 집안 식구 지키다가 우리 집안 쓰러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안타까움을 털어놨다.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는 군인들에게는 더욱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시간이다. 이번에 인명 구조의 모범을 보인 10명의 신우들에게도 역시 일 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다.성탄절 전야제 순서를 준비하고 성탄 트리를 만들면서 자칫 삭막할 수 있는 군대생활의 낭만과 여유를 누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평소에는 빵과 음료수로 간식이 제공되지만 크리스마스 때에는 피자나 햄버거 등 특별간식이 준비되어 모든 신우들의 열렬한 환호성을 자아낸다.이들 교회에서는 또 함께 예배드리는 민간인 교우 가정들이 1만 원 상당의 선물을 준비해서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쌓아둔다. 성탄 전야 때에 행운권 추첨을 통해 병사들에게 나눠주는데, 품목도 다양하고 무엇이 들었는지 몰라서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설레며 기다리게 한다.더욱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여러 사람들을 구조했던 이들에겐 이번 2017년 크리스마스가 더욱 더 잊지 못할 성탄절이 될 것 같다. 우리의 생명을 구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로 인해 얻은 우리의 새 생명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온 몸과 마음으로 느껴지는 거룩한 밤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에서 열린 세계 피트니스 대회에서 입상한 추민수 쿠다실용댄스협회장은 신앙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의미있게 쓰게 됐다고 고백한다. 1년 전부터 어려운 일들이 계속 됐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었더니 요즘엔 좋은 일들이 계속 응답되고 있다며 늘 '아름답고 건강한 몸 전도사'로 살 수 있도록 기도한다. ‘동안 주부’로 매스컴을 많이 탄 추민수 씨(50)는 요즘 살 맛 난다. 지난 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17 머슬마니아 피트니스 아메리카 위크엔드 인 라스베거스’ 대회에서 미즈비키니 마즈터즈 부문 3위에 올랐다. 최고령 참가자로 국내 대회에서 띠 동갑들과 겨뤄 1위를 차지해서 올라간 세계대회 첫 출전에서 뜻밖의 높은 성적을 거둔 것이다.그녀가 “금의환향하게 돼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언론에 소감을 밝힌 속사연이 있었다. 누구는 실력이라고, 누구는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안다, 이게 하나님의 응답인 것을.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무척 힘든 시절을 보냈다. 사업이 계속 막판에 엎어지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투병 기간이 겹치기도 했다.‘그래도 순종’을 맘에 되새기며 하나님을 계속 붙들었더니, 그녀는 지금 한겨울에 훈풍을 경험하고 있다. 한때 나름대로 돈과 명예를 좀 누리면서 삶의 허무에 빠지기도 했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면서 ‘아름다움과 건강 전도사’의 사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녀가 처음 교회를 나가게 된 계기가 독특하다. "나이 먹어서도 여성은 여성성을 잃지 않고 아름답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신앙생활과 운동을 통해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추민수 집사 교회 나가며 달라진 인생“그전엔 교회를 다니다 말다 했죠. 그러다 거의 끊고 살았는데, 어느 날 좀 힘든 꿈을 꾸게 됐어요.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무서운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시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아는 분에게 상담을 했더니,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는 것 같다고 해요. 그때부터 그분이 다니는 교회를 나갔어요. 그런데 목사님 말씀이 얼마나 꿀처럼 단지, 정말 사모하며 교회를 나갔거든요. 그때부터 나쁜 꿈을 꾸지 않게 됐어요.”2년 후 쯤에 현재 출석하고 있는 둔산제일감리교회(담임 문상욱 목사)를 다니면서 신앙이 더욱 깊어졌다. 벨리 댄스로 돈도 벌고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늘 영적으로는 헛헛함에 목말랐던 그녀였다. 때로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유명세의 뒷담화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삶은 더욱 허망해졌고 술로 지우려는 시간이 잦아졌었다.“처음 이 교회에 들어가 찬양을 하는데 시간 내내 눈물을 쏟았어요. 새벽기도회를 나가면서 방언을 받았고요. 즐겨 마시던 술도 먹기 싫어지더라고요. 술 먹고 기분 좋은 것도, 세상적 쾌락도 결국 순간이잖아요. 말씀으로 깨닫게 되니까, 다 끊게 되더라고요.”삶의 변화도 생겼다. 세상적인 부귀영화가 이전의 삶의 원동력이었다면 이젠 달라졌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을 더욱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드는 사명을 깨달았다. 여성에게 유익한 아름다운 동작을 가진 벨리댄스와 여성의 기능을 높이고 몸매를 가꿀 수 있는 피트니스를 결합해 ‘펠트니스’라는 새로운 운동을 개발하고 국내외로 보급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그동안 끊임없이 도전해왔다.“23세부터 에어로빅을 했고요, 30대에는 댄스스포츠를 했어요. 그때 TV에서 외국인이 하는 벨리댄스를 처음 보고 방송국까지 수소문을 해서 그분을 만났고 이어 터키에 벨리댄스 유학까지 갔다 와 벨리를 가르치면서 국내 1세대 벨리댄서로 유명해졌죠. 그런데 벨리댄스는 운동적인 면은 좀 약해요. 그래서 피트니스의 운동적인 부분을 여기 혼합시킨 거죠.” 벨리댄스 1세대인 그녀는 벨리댄스와 피트니스를 결합한 '펠트니스'를 보급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피트니스대회에 나가 띠동갑들과 겨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사진은 라스베가스 세계 대회 수상 모습. 벨리와 운동의 결합 ‘펠트니스’벨리댄스 쪽에서는 ‘협회장’급이었지만 피트니스 쪽에는 초보자였던 그녀, 모든 걸 내려놨다. 초심으로 돌아가 4년 전부터 피트니스를 시작했고 몸을 만들어갔다. 그가 개발한 펠트니스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자신이 피트니스 쪽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했다.“그래서 이번에 피트니스 대회에 나갔는데, 국내 대회에서 1위로 세계 대회 출전권을 얻었고, 이어 라스베가스 세계 대회에서 뜻밖에 3위까지 하게 된 겁니다. 지난 1년간 너무 힘든 일들이 많아서 더욱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지난 해 이맘때, 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펠트니스’ 브랜드를 중국에 런칭하려고 중국을 방문했다. 그날이 하필이면 한국에 사드가 배치되던 날.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렇게 계속 일이 틀어졌다. 그녀가 국내에서 일하고 싶은 센터와 MOU(업무협약체결)을 맺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이상하게 막판에 무산됐다.“그 와중에 제가 또 병원에서 백혈병이 의심된다고 해서 정밀진단을 받으며 일주일 동안 정말 눈물로 기도했는데 이상 없다는 판정을 받았어요. 그래도 그때 너무 힘 들었죠. 그뿐 아네요. 서울에 계신 아버지께서 갑자기 아프셨어요. 그래서 대전에서 서울까지, 일주일에 두 세 번씩 갔죠.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를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절망스러운 일들이 잇따랐지만 그녀는 더욱 하나님께 매달렸다. 스데반 집사를 생각했다. 모든 게 형통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건 쉽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도 계속 감사하고 순종하기란 쉽지 않은데, 이럴 수 있다면 이게 진짜 축복이 아닐까. 이런 믿음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후로 6개월, 이번엔 좋은 소식들이 이어졌다.“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을 영접하셨어요. 정말 그 과정에서 기적 같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일하기 원했지만 잘 안됐던 센터 관계자들이 이제는 거꾸로 적극적으로 저와 함께 일하자고 제의하면서 저를 많이 도와주시고 있어요. 이번 대회도 그분들이 도와주셔서 나가게 된 것이고요. 또 그렇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가족은 늘 추 집사에게 기쁨의 원천이다. 특히 엄마와 늘 소통하며 신앙생활도 열심히 잘하는 두 아들이 늘 고맙고 대견하다고 한다. 고난 견디니 응답이 와대회를 마친 후에 그녀는 중국을 방문했다. 지난 해 사드 배치로 무산됐던 펠트니스 브랜드를 런칭하고 돌아왔다. 반응이 좋아서 곧 다시 들어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피트니스 대회 수상을 통해 그녀의 브랜드 가치가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녀가 먼저 손 내밀지 않아도 사방에서 지원군들이 모여들고 있다.“신앙을 갖기 전에는 이런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펠트니스 같은 걸 만들고 하는 모든 게 세상적 욕망을 추구하는 방편이었죠. 그러나 이젠 그건 허무한 거라고 생각돼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달란트로 남을 위해 쓰는 의미가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그녀도 사람인지라, 이렇게 고백은 하지만, 언제 유혹에 넘어질까 두려움도 살짝 있다. 그래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에 늘 하나님 말씀을 올린다.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알린다. 미리 방어막을 쳐두는 거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걸 공포해두면 늘 그걸 염두에 두고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으니까.“우리 신자들이 나이를 먹어도 여성성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이 들면 남자는 여자가 되고, 여자는 남자가 된다고 하는데,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남성은 남성답고 여성은 여성다운 게 하나님의 뜻이죠. 할머니도 소녀의 마음이 있어요. 저도 50대가 되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노력도 안하고 포기하는 건 옳지 않죠.”아름답고 건강한 몸은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 몸은 편안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고통이 필요하다. 고통을 오히려 즐기며 견디는 가운데 근육은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믿음의 근육도 그렇다. 파도와 같이 닥치는 인생의 고난을 믿음으로 견딜 때마다 단단해지고 또 한고비 넘길 때마다 유연해지는 나의 인생.오늘도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되뇌며 추민수는 땀으로 온 몸을 적신다. 장기기증 서약을 한 그녀는 언젠가 눈을 감는 날, 누군가에게 좋은 몸을 선물로 주고 싶다. 살아있는 오늘, 누군가에게 희망을 선물로 주고 싶다.
남편과 두 아들을 가진 29년차 직장인으로서 일과 살림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며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워킹맘' 상을 받은 이대목동병원 이은화 특성화간호과장은 "1, 2프로만 더 잘하자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하나님과 모든 분들에게 감사했다. ‘현모양처’가 꿈인 소녀가 있었다. 부모님이 기독교인이셨지만 엄격한 유교적 가풍 속에서 자란 그녀에겐 지당한 꿈이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현모’에 ‘양처’, 게다가 ‘일’까지 잡은 이대목동병원 특성화간호과장 이은화 집사(서울 당산동 남서울교회).그가 지난 9일 여성가족부가 후원하는 ‘2017 대한민국 자랑스런 워킹맘’ 상을 받았다. ‘워킹’(일)도 잘하고, ‘맘’(어머니)도 잘했다는 건데, 그럴 만하다. 이대목동병원의 오픈 멤버로 들어와서 가장 이른 나이에 수간호사가 됐고, 전체 간호부 1천 명 중에 6명인 과장으로 2008년부터 일하고 있다.머리 말릴 시간이 없어 맨날 묶고 출근했을 만큼 바쁜 30년 직장생활이었지만, 두 아들을 새벽이든지 한 밤중이든지 배 곪고 집을 나서게 한 적이 없었고, 남편이 찬바람 맞으며 여름 양복을 입고 출근하도록 무심치 않았으니, 그 꿈이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닐까. 직장에서 신자답게 살기“88년도에 이대를 졸업한 후에 주로 타 병원에서 일했어요. 그래서 사실 목동이대병원이 오픈할 때 스타트그룹 47명에 제가 포함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부분이고 지금도 감사한 일이죠. 중환자실 주임간호사로 처음 시작했어요.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관리자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것도 좋았죠. 성취감이랄까요. 제가 좀 적극적인 편이라서요.”군대로 보면 야전 경험이 있는 지휘관이 더 인정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중환자실은 베테랑 간호사의 ‘메카’와 같아서 여길 거쳐야 위기상황에 대처할 기본기를 쌓게 되고 더 큰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힘들었지만 그녀는 “매순간이 감사했다”고 고백한다.“제가 워낙 활동적이고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 사람이나 일을 어려워하는 스타일이 아네요. 그런데 최근엔 오히려 이런 저의 모습이 어떤 사람들에겐 부담이나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어린 나이에 선배들보다 먼저 진급을 하고 과장이 된 것도, 지금 돌아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요즘은 좀 눈에 안 띠며 일을 잘하는 지혜를 배우려고 해요.”모태신앙인이었지만 ‘선데이크리스천’으로 살았던 그녀는 직장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몇 년 전부터 더욱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됐다. 늘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가정일과 직장일이 쌓여서 무거워진 눈꺼풀로 예배시간이면 졸기도 했는데, 이젠 달라졌다. 말씀마다 다 “내 이야기”같고, 기도마다 더욱 간절함이 서려졌다.“직장에서 좀 힘들었을 때, 교회에서 전도폭발훈련을 받았어요. 상황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거든요. 그런데 한 번도 빠지지 않았어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죠. 너무 감사했어요. 요즘은 목장예배에도 참석해요.”섬기는 직장이 기독교병원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더 크게 나타낼 수 있도록 하는 기도도 빠트리지 않고 있다. 현재 간호부의 20%가 기독교인인데 직원예배에는 거의 참석 못하는 게 늘 안타깝다. 참석 문자를 보내다가 오히려 시험 들 때도 있다. 직장에서 크리스천임을 드러내며 생활하는 게 녹록치 않다. 이대목동병원은 여성암을 특화시켜 많은 여성 암환자들이 편안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암환자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치고 환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맨 오른편에서 두번째). ‘양처’보다 어려운 ‘현모’“부족하지만 우리 병원에서 더욱 기독교 정신이 구현되도록 제가 밀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실천한 게 기독간호사협회 일과 수련회에도 참석하며 기도도 받고 노력도 했는데요, 그게 계기가 되어 이대목동병원 간호부에 성경통독반이 생겼어요.”지난 3월부터 시작된 통독반은 7명씩 3그룹으로 2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매일 카톡방을 통해서 365일 성경통독의 은혜를 나누고 서로 격려한다. 한 번도 제대로 성경 통독을 못해본 그녀도 최근 드디어 구약을 거의 끝내가고 있다. 성경을 읽으며 서로의 마음도 따라 읽고 서로 더욱 섬기게 되는 모습에 그녀는 요즘 가장 행복하다. 역시 말씀 속에 길이 있다.“현모양처에서 ‘양처’는 부모님께 받은 거예요. 부모님이 저희가 여자답게 사는 걸 원하셨어요. 딸 다섯이 다 여대를 나왔어요. 저도 그 옆에 대학을 가려다가 이대를 간 거예요. 이브닝 근무를 해도, 아무리 힘들어도, 남편의 옷과 식사를 다 챙기고, 출근하는 뒷모습을 배웅하며 살았죠.”‘현모’는 어떨까? 그녀는 ‘양처’가 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항상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아들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강하게 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해줄 수 있는 건 밥뿐이었다. ‘그래, 밥이라도 잘 해주자’, 이런 맘 같은데, 사실 이것도 쉽지 않다. 어머니의 사랑은 밥상 위에 있다.“직장에서 점심 먹을 때에 잠깐 잠깐 생각하죠. 오늘 저녁을 뭘 해줄까. 장을 봐서 꼭 밥을 해줬어요. 둘째는 도예를 전공해서 이천에 있는 학교를 다녀 새벽 6시에 나갔어요. 새벽밥을 해줬고, 또 고3 때는 밤에 학원에서 오면 꼭 차려주고요. 여러 번 밥을 차려도 혼자 밥 먹게 하진 않았어요. 저희 가정은 누가 혼자 먹어도 꼭 같이 앉아있어 줍니다.”어머니가 밥을 차려주고 또 함께 있어주는 일은 가정교육에서 매우 중요하다. SBS는 ‘밥상머리의 작은 기적’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과학적 실험을 통해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게 자녀의 정서와 장래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다. 기독교 가정이었지만 유교적인 부모님의 가풍에 따라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녀는 '양처'보다 '현모'가 어렵다고 한다.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늘 고민하고 기도한다. 사진은 자랑스러운 워킹맘 수상식에서. 가정의 행복은 지키는 것“모든 가정이 다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다만 말을 안 해서 그렇죠. 저희도 어려움이 닥쳤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내린 결론은 그 어려움이 어떤 것이든지, 가정의 행복을 깨트린다면 그건 억울한 일이고 안타까운 일이란 거죠. 가정은 돈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니까요.”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남편은 결혼할 때 교회를 안 다녔다. 그러나 차로 그녀와 아이들을 교회까지 태워다 준지 5년째였을 때 그녀가 소원을 말했다. 남편 손잡고 함께 교회 들어가서 예배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을 듣더니 군말 없이 그 다음 주부터 교회를 함께 나갔다.“지금은 권사님이 되가지고 저보다 더 잘 믿어요. 주일날 저를 외롭게 만든다니까요. 워낙 순종적이고 충성하는 사람이라, 모든 분들에게 사랑을 받아요. 여러 일들을 맡았다가 지금은 해외선교팀장을 맡고 있어요. 작년엔 저도 함께 몽골봉사를 갔다 왔죠. 교회에서는 더욱 중책을 맡기려고 하시는데, 이것도 기도제목이죠.”부모라면 모두 공감하듯이 자식은 영원한 부모의 기도거리다. 그녀에게도 자녀의 신앙이 숙제다. 더욱 기도가 필요한대, 하늘도 아시는지 묵상만 하면 자녀에 대한 묵상이 나온다고 한다. 그녀의 꿈인 ‘현모양처’는 오늘도 이뤄가고 있는 진행형이다.“지금도 월요병이 있어요. 주일 날 저녁에는 괴로워요. 직장생활 29년을 했는데도 월요일이 되면 마음이 아직도 무거워요. 수간호사 시절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과장을 달고부터 더 그런 것 같아요.”그래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좋았던 게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이해도가 커졌다는 점이다. 남자들이 밖에서 직장 생활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남편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집에서라도 기를 살려주려고 한다. 아마 그녀의 영원한 기도제목일 거다.“우리 남편, 우리 아이들, 으쌰으쌰, 힘내라, 힘!”
스마트폰 액정에 눈을 빼앗긴 현대인들이 다시 지면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맹성숙 권사는 독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카페에선 커피 한 잔에 책을 담고, 거리에선 책 한 두 권쯤 들고 다녀야 폼이 나던 시절이 있었다. 굴러다니는 단풍을 보며 생각 좀 하며 살만한 가을에는 더욱 그랬다. 이맘때면 으레 한국인들의 빈곤한 독서량이 도마 위에 오르곤 했지만 이제는 그런 지적마저 촌스럽게 여겨질 정도다. 화려한 스마트폰 액정에 눈을 빼앗긴 오늘날 한국의 풍속도다.맹성숙 권사(염광교회)는 이런 스마트폰 세상에 도전장을 냈다. 어느 한 해는 1000권을 목표로 닥치는 대로 읽으며 독서의 영토를 넓히고, 또 어떤 주제에 꽂히면 깊이 파고들어 독서의 금맥을 찾는 재미로 살면서, 소원이 있다면 교보문고에 3개월 텐트치고 사는 것이라는 그가 ‘어느 평신도의 책읽기’라는 책을 냈다. 기독교인의 독서문화와 출판문화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뭐라고 하고 싶은 소박한 열정이 거기 담겼다. 독서 입맛 당길 추천도서들“기독교 출판문화가 빈약해진 게 안타까웠어요. 저 같은 부족한 평신도가 소박한 마음으로 책을 낼 수 있어서 감사해요. 더 많은 평신도들이 저와 같은 책을 낼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어요. 책읽기를 통해서 성경적 세계관이 정립이 되면 믿음의 지평과 생각이 더욱 넓어지게 되는 거죠. 그 후에 읽는 성경은 더 풍성한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대략 20개의 주제 아래 그가 뽑은 책들의 특성과 느낌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을 더 사랑하기 위한 책’이라는 장이 있다. 그가 ‘이 책을 만난 것은 내 생에 축복 중의 축복이며 소중한 감사’라고 칭송하는 ‘구약의 문학적 구조: 창세기-말라기 주석’(데이빗 돌시)이 소개된다. 이 책을 통해 시나 문학 해석처럼 성경의 ‘행간’을 읽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됐다.이어 ‘성경에서 나를 만나다’(문동학), ‘하룻밤에 읽는 성서’(이쿠다 사토시), ‘예수 시대의 갈릴래아’(뵐리발트 보젠) 등을 통해서 성경의 우물에서 깊은 생수를 길어 올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나날이 줄어드는 교회학교 어린이들, 예전 우리 신앙세대와는 달라 걱정이 되는 요즘 아이들을 컴퓨터 게임의 포로에서 구원하고 싶다면 ‘아이 손에 쥐어주고 싶은 책’으로 가자. 어린 시절에 만난 감명 깊은 책은 평생 그의 삶을 좌우하기도 한다.‘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기독교 동화로 개작한 ‘작은 영혼과 바보 온달의 이야기’(이현주), 비기독교출판사에서 출간했지만 생생한 그림과 글이 빛나는 ‘노아의 방주’(아서 가이서트 글 그림),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위한 좋은 선물이 될 ‘크리스마스까지 아홉 밤’(오로라 라바스티다 글, 매리 홀 엣츠 그림), ‘완벽하게 아름다운 책’이라는 독사서평이 실감나는 ‘퀼트 할머니의 선물’(제프 보럼보 글, 게일 드 마켄 그림),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성경 속의 동물 이야기’(데이비드 우드워드) 등등,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지만 어떤 책이 좋을지 난감한 어른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특히 비기독교 서적을 통해서도 더 넓고 깊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다가갈 수 있는 길잡이 역할도 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 책에 소개되진 않았지만 ‘신갈나무 투쟁기’(차윤정, 전승훈) 같은 책은 기독교 서적은 아니지만 그가 두 번이나 읽고 그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렸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신비를 이 책에서 다룬 신갈나무를 통해서 알게 됐다. 책을 읽으면서 꼼꼼히 기록해놓은 독서 메모들. 이 메모들을 정리해서 '어느 평신도의 책읽기'라는 책을 냈다. 크리스천의 책읽기는 성경적 세계관을 더욱 확립하고 믿음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서점들과 연애에 빠졌던 추억“책을 좋아하게 된 건 아버지의 덕이 커요. 아버지는 학교 고용원 아저씨였는데 선생님들과 대화 속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깨달으셨던 것 같아요. 그러나 박봉이셔서 일부러 숙직을 담당하셔서 숙직비로 책을 사주셨죠. 또 교회 다니면서 교회 언니, 오빠들과 토론하면서 책을 소개받으며 독서의 맛을 알아갔고요.”삼중당 문고하면 중학교 시절 냄새가 난다. 중학교 작은 도서실에 꽂혀있던 삼중당 문고로 고전문학을 만났다. 고등학교 때 만난 담임선생님도 그의 독서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한때 독서에 빠져 학교 공부가 시시해지고 자퇴까지 하려고 했을 때 선생님은 그의 마음을 붙잡아주시고 토요일 종례시간마다 그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게 했다. 덕분에 공부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서점의 추억이 있다. 그에게는 첫사랑인 ‘종로서적’, 아껴둔 사랑인 ‘영풍문고’, 그리고 현재의 사랑인 ‘교보문고’다. 1982년 1월 겨울, 휑뎅그렁하고 쓸쓸했던 청계천 헌책방 길을 헤매던 생각이 난다. ‘책을 싸게 살 수 있다’는 교회 선생님의 말을 지도 삼아 먼 그곳까지 찾아왔다. 그 걸음이 종로서적으로 이어졌다.“그날 종로서적에서 책을 한 권 사서 집에 오는데 정말 큰 부자가 된 것 같았어요. 층층마다 빼곡하게 책들이 꽂혀 있는 게 신기했죠. 그 후로 종로서적은 제게 도서관이고 놀이터고 약속장소였어요. 나중에 종로서적이 문을 닫은 후에도 한동안 그 앞을 서성였던 저의 첫사랑이죠.”영풍문고는 그에게 ‘아껴둔 사랑’같은 곳이다. 영풍문고는 좋은 책들이 잘 선별되어 있어서 그의 독서에 실제적인 도움을 많이 줬다. 특히 인문과학 코너에 가면 마치 ‘독서 소믈리에’가 엄선해주는 책을 맛보다는 것과 같았다.교보문고는 그에게 거룩한 처소다. 이곳에 들어가면 마음의 신발을 벗고 언어를 상실한다. 지식을 탐구하는 구도자가 된다. 언젠가는 전날 주일 교회 봉사로 천근만근인 몸을 판피린 하나로 추스르고 교보를 찾았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종일 서서 책을 읽은 적도 있다. 어느 새 책의 숲속에서 그 자신도 한그루 나무가 된다. 선교지에서 만난 이웃들과 함께 수많은 책 중에 그래도 성경어떤 해에는 독서 천 권을 목표로 달려들어 850권을 독파하고, 한 작가에 꽂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이어가고, 관심 역사 주제에 관련된 책들을 8개월 내내 읽기도 하고, 책이 잘 읽혀지지 않을 때는 도리어 열 권 정도 쌓아두고 번갈아 읽으며 ‘내 정신에 죽어가는 세포에 게릴라성 폭우를 쏟아 붓는’ 그의 독서편력에도, 역시 결론은 성경.“지금까지 수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수백 번, 수천 번 읽어도 그때마다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주는 건 성경이에요. 성경을 죽어라고 읽고 싶어서 번역본을 사서 함께 읽고, 도표나 지도를 성경에서 오려서 정리하고, 성경을 쪽성경으로 나눠 가지고 다니며 읽었죠.”그 감동을 자녀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었다. 어느 날 문득 영어 수학 과외로만 돈을 쓰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웠다. 교회 전도사님을 집으로 초청해 자녀들에게 성경과외를 시켰다. 아이들은 방에서 전도사님과 성경을 읽고, 그는 마루에서 읽었는데, 눈물 나도록 좋았다.“책방에 가면 그래도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기독교서적 코너에요. 그런데 사실 그때마다 실망이 더 커요. 기독교 출판문화가 너무 빈곤해요. 유명한 목사님들이 내는 책을 보면 설교문을 그대로 냅니다. 설교문체는 읽는 맛이 없어요. 비신자들에겐 공감이 안되죠. 그걸 다시 문학적으로 가공해서 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될 텐데, 그게 참 안타까워요.”이맘때 노란 은행나무 숲속이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한동안 신앙의 미로를 헤맸던 그는 가을에 하나님을 만났다. 행실 나쁜 아이가 방언을 하고, 불신자 가정의 친구가 매를 맞으면서도 교회 다니는 걸 보면서, 자기의 신앙이 하찮게 보였다.그러던 그가 어느 가을, 곱게 물든 은행나무 숲을 지나다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았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그 제사 보였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만들었구나!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단풍 속에 있었다. 지금도 새벽마다 그 하나님을 만난다. 책속에서 만난 하나님을 되새김질한다. 그 만나를 먹으며 오늘도 힘차게 하루를 시작한다.
불교 가문에서 죽을병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와 노력으로 기사예보의 '전설'이 된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은 인생에 나쁜 날씨란 없다고 한다. 기상예보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케이웨더의 반기성 예보센터장이다. 기상청이 국가적 기관이라면 케이웨더는 사설 기상예보센터로 기후 관련 정보를 기업에 파는 회사다. 예산과 인원, 시설로 따지면 케이웨더는 기상청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결과는 흥미롭다.몇 년 전 와이티엔 웨더라는 채널에서 기상청 예보와 케이웨더 예보를 한 달 정도 비교한 적이 있다. 기상청은 ‘날씨 맑음’인데, 케이웨더는 ‘우천’이라는 전혀 상반된 예보. 다음날 결과는 케이웨더의 승! 케이웨더의 승리가 이어지자 어떤 속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비교 방송은 중단됐다. 스님이 ‘교회 가라’고 권유이 놀라운 예보 경쟁의 중심에 반기성 예보센터장이 있다. 그의 드러나지 않은 또 하나의 직책은 목사라는 것. 여기 남다른 사연이 있다. 1987년 군인으로 전투비행단에서 기상대장을 맡았던 그는 과로로 쓰러진다. 당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사이에서 모든 비행기는 북한도발을 막기 위해 ‘0분대기’를 할 정도로 긴박했다. 공군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상예보를 맡은 그 역시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투병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기관지 천식이 폐기종으로 진전했어요. 몇 번이나 숨을 못 쉬고 죽을 뻔해서 119에 실려 가곤 했었죠. 당시 어머니가 충북 충주에서 불교신도회 회장을 해서 저를 고치시려고 천도재 등 별별 걸 다 하시고 부적도 7장이나 붙이고 살았습니다.”그러나 차도가 없었다. 당시 그 절의 주지스님은 어머니에게 ‘내가 보니 교회 가서 살아난 사람도 있으니, 아들은 교회를 한번 보내보라’고 권유했다. 1993년, 처음 아내와 함께 교회를 나갔다. 그 후 1995년 부활절을 앞둔 토요일, 기도 중에 병이 나았다.“기도를 하는데 제 몸이 나았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전까지 약을 한 움큼 씩 먹었는데, 다 버려버렸어요. 그리고 진짜로 나았어요. 다 죽는다고 했는데 살아났거든요. 그러자 인생 별 거 아니구나,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 중령이었는데, 남은 인생은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대전 침신대를 들어갔습니다.”연금을 받을 수 있는 20년 복무를 다 채우자 이제 고향 충북 음성에 가서 농촌 목회를 하며 여생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기도 중에 하나님은 ‘너는 목회를 하지 말고 계속 기상에서 일을 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한 달간 도리질을 쳤지만 하나님의 강권을 뿌리칠 수 없었다. 순종하며 하나님께 두 가지를 요청했다. 하나는 대령 진급이고, 또 하나는 기상 분야에서 최고가 되게 해달라는 간구였다.“제가 공사 출신이 아니라 학사장교 출신이라 진급이 어려웠고, 또 제대한다고 콜을 하고 신학교 다녔기 때문에 보직 인사관리가 전혀 안되어 있었죠. 대령으로 진급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2000년, 대령으로 진급이 됩니다. 진급 심사에 들어갔던 분들이 공군 역사상 이렇게 점수 나쁜 사람이 진급 받으려고 들어왔냐는 말을 들었는데, 기적이 일어난 거죠.” 계룡대 삼군본부교회 새벽기도회에서 하도 울면서 크게 기도해서 주변에 사람들이 오지 않았을만큼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한 그는 지금도 사무실에서 틈틈이 성경을 보며 영감을 얻는다. 고독한 결정 책임도 혼자서기적은 그이후도 계속됐다. 공군에서 기상예보 총 책임자인 중앙기상부장을 맡았다. 예보는 결국 최고 책임자가 혼자 결단한다. 수많은 자료와 협의를 거치지만 결국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연히 그 책임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슈퍼컴과 AI까지, 첨단 과학 기상예보 시스템이 마련됐지만 집중호우, 태풍, 폭설 등과 같이 데이터가 예측하기 어려운 것들은 기계가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의 통찰력이 중요하다. 그를 기상예보의 ‘레전드’로 만든 일화가 있다.“2000년인가요, 태풍 사오마이가 올라올 때입니다. 기상청과 세계의 모든 태풍 예보를 내는 기관들, 앞서가는 미국 일본까지도 다 서해상으로 북상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저 혼자만 동쪽으로 가서 부산 쪽으로 빠진다고 했죠. 저는 기도하는 사람이라 배짱이 있거든요. 끝까지 결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태풍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가는 공군에겐 매우 중요하다. 격납고 안에 넣을 수 없는 수송기들은 미리 대피시켜야하기 때문이다. 기상청 예보대로라면 서해안 쪽의 성남 비행장 수송기들을 대피시켜야 했다. 결국 반 센터장의 예보대로 태풍은 부산 쪽으로 올라가서 전혀 피해가 없었다.“틀렸더라면 전 감방에 갔겠죠. 그 피해가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또 군대에서는 집중 호우 때문에 매년 20-30명이 죽습니다. 훈련하다가, 작업 나갔다가 피해를 보는 거죠. 그런데요, 제가 3년 맡은 동안에는 한 명도 집중호우 때문에 죽은 경우가 없어요. 제가 마친 후에 다시 인명 피해가 나더라고요. 2001년인가, 집중호우 때문에 서울에서만 62명이 죽은 때가 있었습니다.”그 당시 기상청은 서울에 비가 20미리 온다고 예보했다. 그는 300미리를 예보하고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 전날인 토요일 밤까지도 비가 올 기미조차 없었다. 호우경보 때문에 토요일 골프를 치러 못나간 군인들이 난리가 날 정도였다. 오죽 했으면 그의 부하가 이제라도 해제하자고 권유할 정도였으니까. 그는 다시 기도했지만 여전히 비가 온다는 마음을 주셨다.“자정이 되자 비가 쏟아졌습니다. 서울에서 지하철 2호선이 물에 잠기고 62명이 죽고, 그러나 군대에선 피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가 복무할 동안 기상이 가장 나빴거든요. 태풍 루사, 매미 등등. 그런데 한 명도 안 죽었습니다. 총장님이 저보고 ‘너는 레전드다’, 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부터 제가 공군예보의 전설이라고 불렸습니다.” 기상청에 비하면 인원과 예상이 비교가 안되는 사설 기상예보센터장을 맡고 있지만 예보의 정확성에 관해서는 오히려 앞서 나가는 결과를 내놓고 있다는 반기성 센터장. 인생에 ‘나쁜 날씨’란 없다그는 “제일 복 받은 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고독하게 혼자 결정하고 책임져야하는 기상예보관으로 스트레스가 심할 수밖에 없다. 세상사람 같으면 술과 욕으로 풀겠지만 그런다고 풀려지나. 병만 더 얻을 뿐이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계룡대에 삼군본부교회가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보통 500명 정도 옵니다. 제가 가면 제 주변에는 아무도 안 옵니다. 그렇게 제가 울면서 기도하거든요. 어떻게 결정해야 하나, 그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내 지혜로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기도하면 눈물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나중에 어떤 분을 만나 우연히 그 이야기가 나왔는데, 모르던 그분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줬다고 하더군요. 하도 제가 울며 기도해서요.”기도만 가지고 그가 ‘전설’이 된 건 아니다. 끊임없는 공부가 있었다. 군인 월급 100만 원이던 시절에 50만원을 책 구입에 썼을 정도니까. 지금도 책값으로 수백만 원이 들어간다. 한국어로 된 기상책이 없어서 외국 잡지, 서적, 학회지를 꾸준히 구입해 읽었다. 특히 미국 기상학회지, 영국 왕립 기상학회지, 독일 기상학회지를 계속 보며 최근 예보 패턴을 연구한다. 그런 공부와 경험으로 그는 20여권 책도 냈다.“98년도에 늦둥이를 얻었을 때에요. 제가 공부해야 하는데 아이가 놀아달라고 와서 책을 찢고 그래요. 그래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공부한 적도 있어요. 아내에게 욕을 많이 먹었죠. 군 생활 중엔 골프, 술자리 다 피했어요. 공군에선 골프 안치면 바보 됩니다. 진급할 관계도 못 맺고요. 그런데 천재가 아닌 이상 남 놀 거 다 놀고 쉴 거 다 쉬고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저도 노력을 해야죠. 결국 하나님이 진급도 시켜주시고 기상예보의 최고가 되게 해주셨습니다.”그는 말한다. 좋은 날씨, 나쁜 날씨가 따로 없다고. 아무리 나쁜 날씨도 오래가지 않는다. 장마 중에도 햇볕이 난다. 인생사도 그렇다. 때로 인생의 ‘나쁜 날씨’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가 그랬다.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비도 와야 하고 천둥도 쳐야 한다. 미세먼지만 빼고.
광명시장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맛이 있는 '광명할머니왕족발' 대표 조용철 집사는 아내 손영란 집사와 함께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으며 시장 상인들을 위해서도 '열일' 하는 친절하고 유쾌한 족발집 사장님이다. 족발을 시켜 포장을 열어보니, 족발과 함께 예수 믿으라는 전도지가 있다. 전도지가 없으면 ‘광명할머니왕족발’의 것이 아니다. 그 전도지가 부끄럽지 않을만한 맛과 멋이 아울러 있다는 게 자랑이다. 맛으로 따지면 이미 검증이 끝난 소문난 맛집이고, 멋은 겉만 번지르르한 겉멋이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한 속멋이다.이집 사장 조용철 집사는 20년 넘게 가난한 장애인 공동체를 지원하고 있다. 노숙자들을 섬기는 교회를 돕고, 밤늦게 찾아온 소방대원들의 얄팍한 지갑을 고려해 두 개 남은 왕족발을 거의 하나 값에 쏴버리는가 하면, 매주 결손 가정에 기부하기도 한다. 이 모든 멋진 일들은 20년 전 배달 나갔다 만난 ‘사랑의 집’에서 시작됐다. 밤길 해매다 만난 사람들“족발 배달을 나가다 보면 종종 길을 해매기도 하고 재밌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배달을 갔는데 가도 가도 산속이에요. 알고 보니 스님이 족발을 시키셨더라고요. 저보고 ‘곡차는 왜 안 가져왔느냐, 다음엔 곡차도 가져오라’고 하시더라고요.”그날도 원광명마을이라는, 꽤 먼 곳까지 배달을 갔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 해매고 있는데 어디서 불빛이 보였다. 저기 밖에 없겠다는 생각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장애인들이 사는 곳이었다. 다음 날까지도 그 장애인들이 계속 생각났다. 계속 마음이 쓰였다. 다시 찾아 갔다.낮에 가보니 더 기가 막혔다. 큰 은행나무 밑에 6.25 전쟁 당시 판잣집 같은 집이었다. 루핑을 입힌 지붕 위엔 타이어가 여기 저기 올려져있었고 집안에는 스치로풀 위에 낡은 장판이 전부인 곳에서 관절이 굳어가는 병을 가진 목사님이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후원 받아 먹는 음식도 좋지 못했다. 그날부터 족발을 선물했다. 어머니를 이어 아내와 족발집을 맡으면서는 매일 1만원씩을 떼어 그들을 후원했다.다다다다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울리면 아이들이 쪼르르 내려와 그를 반겨준다. 이게 벌써 20년째다. 그 동안 판잣집은 벗어났지만 후원은 되레 줄었다. 겨울이면 여기 저기 밀린 기름 값 때문에 주유소에서 기름을 주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는 다시 큰 돼지저금통을 샀고 매일 만원 씩 돼지밥을 줬다. 일 년이면 365만원, 매월 12월 말이 되면 모은 돈을 전달하는데, 이게 광명왕족발집의 가장 흐뭇한 이벤트다.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좋은 소리만 듣는 건 아니다. 그는 광명시장 발전을 위해서 매일 페이스북 등 SNS에 광명시장 내 가게들을 소개하고 품목별로 시세를 알려줬다. 그 덕분에 매상이 많이들 올랐는데, 어떤 이들은 맘에 안들 게 올렸다고 멱살잡이를 하고, 어떤 이들은 장사가 잘된다고 족발집을 새로 차려 그의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몸까지 상하면서 수고했는데, 그 대가는 씁쓸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것도 하나님이 다 정리해주시더란다. 20년 전 어느 밤, 하나님의 인도로 인연을 맺은 장애인 공동체 사랑의 집을 꾸준히 후원하며 가족같은 사랑을 나누고 있는 조용철 집사. 그의 오토바이 소리만 나면 모두들 반갑게 마중나온다고 한다. 조 집사를 뒤에서 안고 승리의 브이자를 하는 장애우 친구의 모습이 즐겁다. 정직과 믿음의 맛집조 집사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62년도부터 문래동에서 족발집을 시작했다. 그후 영등포를 거쳐 지금 이곳 광명시장으로 왔다. 광명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족발집이기도 하다. 그에게 맛집의 비결을 물었다.“가장 중요한 건 족발이죠. 저희는 국산을 씁니다. 수입은 영하 50도 냉동이고 국산은 냉장 상태로 들어오니 당연히 고기 맛부터 다르죠. 사실 국산 쓰는 집이 많지 않아요. 국산이라고 속이다가 걸리면 그냥 가게를 닫아버리고 다른 데 가서 또 하면 되니까요. 저희는 국산 좋은 족발에 60년 전통의 노하우로 9가지 약재를 넣어 정성을 다해 만듭니다. 지역 단골 장사라서 맛이 없으면 금방 표가 나거든요.”요즘 맛집을 평가하는 블로그에는 끝에 ‘내 돈 내고 먹은 것’이라는 도장을 찍어 공정한 평가였다는 걸 보증하는데, 기자 역시 취재 후에 왕족발을 ‘내 돈 내고’ 포장했다. 집에 가서 대환영을 받았다. 너무 멀어서 아쉬웠는데, 택배도 된다고 하니, 좋은 일하고 좋은 것 먹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싶다.경기가 한참 좋았을 때는 하루에 왕족발만 350개가 나가기도 했다지만 요즘엔 어림도 없단다. 또 소비패턴도 달라져서 옛날엔 집에 사가져가 싸고 편하게 먹자는 주의였는데 요즘은 돈이 들더라도 식당에서 폼 나게 먹고 손 털고 나오자는 분위기다. 그 역시 처음처럼 식당으로 돌아갈까도 고민해봤다.“식당을 하면 술을 팔아야 하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술을 남에게 팔려고 하니까 께름칙하잖아요. 아는 장로님 중에는 룸살롱을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저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 행복할 것 같지도 않고요. 또 예전 식당할 때 술을 팔았는데 하루에 두세 번 꼭 싸워요. 그것도 싫고요.”어머니의 전도로 군 제대 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던 그는 한 동안 교회 마당만 밟고 다녔다. 그러다 청년선교회에 가입한 후 한 아가씨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저 자매처럼 생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3년을 기도했다. 그러나 ‘그 자매’에게 제대로 말 한 번 건네지도 못했다. 죽을고비에서 성령체험“그냥 기도만 한 거죠. 그런데 3년 지나서 교회의 부탁으로 저희 집 근처에 사는 한 자매를 교회 오는 길에 태워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주일날 약속장소로 갔더니 바로 그 자매가 딱 나오는 겁니다. 올커니, 이거였구나! 기도가 응답된 거죠. 그 모델을 두고 3년을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아예 그 모델을 주신 겁니다.”그때쯤이었다. 믿음이 깊어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직장에서 여러 백화점으로 옷을 납품하는 일을 맡았다. 그날 급한 마음에 천호동 부근에서 시속 160km로 달리고 있었다. 뒤에는 1톤이 넘는 옷이 빽빽이 쟁여있었다. 정신 없이 달리는데, 갑자기 도로가 막혔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굉음을 내면서 바닥에 처박힐 듯이 미끄러져갔다.“도저히 앞차를 피할 수 없었어요. 160킬로미터로 총알같이 가다가 급정거를 했으니까요. 순간 몇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적어도 내 두 다리는 절단 나겠구나, 두 다리가 없어도 지금 사귀는 자매가 나를 만나줄까?’”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쏜살같이, 그러나 선명하게 눈앞으로 지나갔다. ‘아, 이걸 보면 죽는다는데, 다리 두 개가 아니라 죽을 수도 있겠구나.’ 주마등같이 지나가는 과거를 보며 마음 밑자락에서부터 후회가 밀려왔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삶이 이런 건 아니었을텐데...그때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그를 안아주는 느낌이 났다. 따뜻했다. 차를 붙잡는 느낌도 났다. 속도가 뚝뚝뚝, 줄어들더니 앞차를 2, 3미터 앞두고 차가 멈췄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걸 이때 체험했다. 그후로 삶이 달라졌다.“언젠가 무당이 우리 족발을 사러 와서 물어요. 저보고 교회 다니냐고, 언제 교회 갔다 왔냐고요. 우리 족발을 사먹으면 맛은 있는데, 점괘가 안 나오더랍니다. 적어도 교회 갔다 온지 3일은 지난 후에 만든 것을 먹어야 자기 일이 된다고 해요.”시장에서 장사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고민도 하고, 사랑의 오지랖이 넓어서 베풀고 나눈 사랑이 되레 아픔과 배신으로 돌아올 적도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굴하지 않는다. 늘 당당하고 늠름하다. 오늘도 유쾌한 왕족발집 사장님은 성령님을 태우고 즐거운 배달을 나간다.
92세 현역 의사인 한원주 권사는 의료봉사활동의 귀감이 되는 의료인에게 주는 '성천상'을 이번에 받았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쑥스럽다"는 그는 30여년을 의료선교의원에서 헌신했고 그후 은퇴한 뒤에는 지금까지 남양주 수동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환자들을 섬기고 있다(사진은 병원 앞에서). 한때 ‘백세인생’이란 대중가요가 히트해서 연세 좀 지긋한 분들에겐 ‘희망가’처럼 불려질 때가 있었다. 그 가사 중에 ‘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구십 세가 넘어서도 정말 ‘아직은 쓸 만한’ 의사가 있다.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 매그너스 재활요양병원의 의사 한원주 과장(소망교회 권사)이다.현재 아흔 둘의 나이에도 68년 째 현역 의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그중에 30여년을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의 부설 의료선교의원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일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요양병원에서 보수에 연연하지 않으며 치매 환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그 공로가 뒤늦게 알려져 얼마 전 의료봉사활동의 귀감이 되는 의료인에게 주는 ‘제5회 성천상’ 수상자가 됐다. 그저 오래 사는 ‘백세인생’이 행복의 조건은 아닐 게다.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진정한 ‘백세인생’의 자랑이 될 텐데, 이런 면에서 백세 현역을 꿈꾸는 그의 꿈을 응원하게 된다. 물리학 박사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가서 내과의사로 일했던 그는 한국에 귀국해 잘 나가는 의사로 남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보내기도 했다(사진은 미국 의사 시절).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서울여자의과대학에서 산부인과를 전공하고 미국에서 내과를 다시 공부해서 내과전문의로 10년 일하다가 68년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 다녀온 의사가 많지 않았어요. 대학병원에서 서로 오라고 했는데, 자녀들 교육을 위해 돈도 필요하고 해서 개업을 했어요. 미국에서 온 여자 의사라고 하니까 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10년 쯤 하니 돈을 좀 모았죠.”그러나 78년 충격적인 사건을 겪는다. 남편이 전혀 뜻밖의 주검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죽고 나자 모든 게 허망해졌다. 돈을 모으는 것도 별 거 아니었다. 명성 있는 물리학 박사였던 남편에다가 공부 잘하는 자녀들을 두고 소문난 명의로 돈 잘 벌고 있던 그에게 부러울 게 없던 시절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게 헝클어져버렸다.“입으로 모태신앙이라고 떠버렸지만 사실 기도생활 제대로 하지 않았고 돈 버는데 급급해서 주일도 빠질 때가 많았고 의사로서 받은 은사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 돌아볼 생각도 없이 살았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죽으니까 할 수 있는 게 하나님께 매달리며 부르짖는 것 밖에 없었어요.”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뭘 그렇게 울고불고 하느냐. 넌 누구보다도 부요하게 살아왔다.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았고,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미국 구경도 많이 했고, 병원이 잘 되서 돈도 많이 벌지 않았느냐. 너는 네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냐?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 차려라.’“그때부터 새벽기도회도 매일 나가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기독여의사회도 나가고 봉사단체에도 나가서 여러 곳에서 무료진료 봉사를 했습니다. 그때 다른 분들과 기독의료선교협회를 만들어 의료봉사를 했는데 질병 치유뿐만 아니라 노숙자들에게 집 얻는 걸 돕기도 하고 직업을 제공하기도 하고 가정문제를 상담해주기도 했어요. 토탈 힐링, 전인치유를 시작한 겁니다.” 한 달에 천만 원씩 벌었던 병원을 그만 두고 한달 백만 원 월급을 받는 의료선교의원 원장으로 갔다. 그러나 이곳에서 은퇴할 때까지 일하며 받은 기쁨과 보람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었다. 천만 원 수입이 백만 원 됐지만시간제로 봉사하던 그는 79년 의료선교원(우리들의원)의 원장으로 일하기 시작해서 2008년까지 도시영세민의 전인치유 사역을 했다. 그 당시 월급은 100만원. 그 전에 병원에서 매달 천만 원씩은 거뜬히 벌었던 때에 비하면 비교가 안됐지만 그때 누릴 수 없었던 보람과 기쁨은 그 간격을 넉넉히 메꿔주었다.“어찌됐든 간에 그럭저럭 살아왔어요. 그 후 28년을 안 벌었는데 굶지 않았고요. 원래 또 제가 돈 쓸 줄을 몰라요. 80이 돼서는 눈이 나빠서 몰던 차도 안 모니까요. 2008년에 은퇴하고부터는 여기 와서 일했습니다. 여기서도 함께 일하는 다른 의사들에 비하면 아주 적은 액수지만 괜찮습니다. 나는 덤으로 사는 거니까요.”그러나 일은 다른 의사들에 비해서 뒤처지지 않는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92세 고령 의사의 능력을 의심쩍어하며 확인 차 나온 적이 있었지만 그가 컴퓨터로 필요한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며 영어로 유창하게 강의하는 걸 보고 감탄사만 연발하고 돌아갔다.지금도 시간을 쪼개 세미나에 참석해서 새로운 의학을 배운다. 적은 월급으로 봉사한다고 일도 여벌로 하는 건 아니다. 계속 발전하는 현대의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환자들에게 죄짓는 거”라고 말한다. 그의 환자 사랑은 일과시간을 넘나든다. 금요일 저녁에 위례에 있는 집으로 퇴근했다가 주일 오후에 다시 들어올 때까지 늘 환자들 곁에 있다.“5시에 일과가 끝나면 저녁 먹고 환자들과 산책을 하고, 페이스북에 나오는 좋은 것들도 보여주고요. 7시에는 제 방에 가서 과자와 차도 먹고 놀다가 보내죠. 아침엔 또 함께 노래도 부르고 놀아주고요. ‘청록회’라는 걸 만들어서 매주 노래도 부르고, 찬송가도 부르고, 같이 운동도 하고, 좋은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환자들이 퍽 좋아합니다. 병은 기술로만 고치는 게 아니거든요.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그래서인지, 그는 영원한 ‘원장님’이다. 병원에선 ‘명예원장’ 같은 직함을 주겠다고 했지만 백세 현역을 꿈꾸는 그는 과장을 고집했다. 그래서 정식 명칭은 ‘한원주 과장’이지만 환자들은 그를 ‘원장님’이라고 부른다. 정식 직함은 과장이지만 환자들은 그를 '원장님'이라고 부른다. 때론 엄마처럼, 때론 친구처럼, 때론 언니처럼 지내며 환자들의 마음까지 치료해주는 그는 여생을 이곳에서 마치려고 한다. 다만, 백세 현역을 넘기고 싶은 꿈이 있다. 병원 로비에서 환자와 웃음꽃을 주고 받는 의사 한원주. 굿상을 발로 찼던 아버지를 따라“남편의 죽음이 그때 큰 불행이었지만 사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원주’는 없었을 거예요. 남편과 안주하면서 여전히 저와 제 가족만을 생각하며 돈 버는데 급급하며 살았겠죠. 지금까지처럼 봉사하는 삶은 없었을 겁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죠.”딸 둘 아들 하나인 그의 자녀들이 이제 6대 째 예수 믿는 가문을 이루고 있다. 1909년 호주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받은 할머니 때로부터 그를 거쳐 증손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것이 가장 감사하다.“아버지가 선교사님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에서 떡을 차려놓고 굿을 하고 있더랍니다. 아버지가 무당 미신은 사교라고 그 굿상을 발로 차버렸어요. 귀신이 해코지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시던 부모님이 하나님이 귀신보다 더 세다면서 믿게 되신 거죠.”아버지 한규상 역시 의사로 독립운동까지 하면서 평생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그는 어린 시절 몸이 무척 약했다. 수학여행 가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곤 했는데 꼭 혼자만 열이 39도를 넘어 수학여행을 한 번도 못 갔다. 체육시간에는 늘 견학만 했을 만큼 병약했던 그가 100세 현역을 앞두고 있으니, 이것 또한 감사하다.인터뷰가 있던 날은 그에게 늦은 휴가 전날이었다. 여름엔 다른 의사들이 휴가 가도록 병원을 지켰고, 긴 추석 연휴 때도 잠깐 나갔다가 들어왔다. 이제야 늦은 휴가를 떠나는 그를 기자는 마석까지 태워주었다. 가는 도중에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울렸다. 그의 전화였다.“딸이 저를 데리러 온다는 걸 극구 말렸어요. 방송에서 제가 집에까지 버스타고 전철타고 6번이나 갈아타며 2시간 반 걸린다는 내용이 나오면서 나쁜 딸이 돼버렸다고요. 제가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지하철 잘 타고 다니는 노인네가 치매 안 걸려요.”그 대신 오늘은 휴가 전날이라 특별히 ‘비싼’ 버스를 타고 간다. 여섯 번까지 안 갈아타도 되는 버스다. 월급을 쪼개 여러 기관을 후원하고, 지금도 쉬는 날을 이용해 무료검진 봉사를 나가는 92세 현역 의사 한원주. 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러 가는 그의 작은 뒷모습 위로 단풍이 곱게 물들어간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제14대 총장으로 지난 11일부터 새로운 출발에 나선 김진두 목사(영등포중앙교회)의 낯빛은 어두웠다. 신임 총장이 되어 화색이 돌 법도 한데, 김진두 목사는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조심스러운 행보에 나선 김진두 목사를 지난 17일 총장실이 아닌 담임목사실에서 만났다. 수많은 의혹이 난무하는 가운데 기자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제14대 총장 김진두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17일 영등포중앙교회 담임목사실에서 만난 김진두 목사는 인터뷰 도중에도 감신대 재학생들과의 전화를 받았다. 김 목사는 학생과의 통화에서 “제발 오해하지 말아달라. 나는 학생과 교수의 편이다”라며 거듭 강조했다. 통화 후 그는 “불신의 골이 깊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김진두 목사가 ‘정치 목사’이기 때문에 총장직에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나는 목회하는 학자로 평생을 살아왔다. 감신대에서 20년, 협성대에서 13년, 연세대에서 3년을 강의했다. 목회만 40년을 지냈다. ‘정치 목사’는 평생 처음 듣는 말이다. 정치를 했다면 1차 투표에서 10표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이규학 전 이사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소명이라고 생각해 총장직을 받아들였지, 정치를 했다면 진작 총장이 됐을 거다.”현재 총장 업무를 보고 있는가“직무 수행 정도만 보고 있다. 괴롭고 답답하다. 가족들도 힘들어하고 있다.”선출 과정에 논란이 많다. 화상회의는 비밀투표가 될 수 없다, 살생부가 있다는 의견에 어떻게 생각하는가“총장에 선출되기까지 아무런 하자가 없다. 모든 것에 원칙대로 진행했다. 화상투표는 사학법에서 제시한 대로 했다.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것은 합법한가. 오히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묻고 싶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목회자다. 누구를 왜 죽이겠느냐. 싸움이 누구로부터 왜, 무엇 때문에 시작했는지 다 알지 않느냐. 또한 내가 외부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내가 쓴 책으로 학생들이 다 공부하고 있는데….”이사들에게 봉투를 돌리는 금권선거를 했다는 의혹도 있다“전혀 없다.”9인 이사회에서 적극 나서고 있는 최희천 장로가 영등포중앙교회다행정상 뜻은 다를 수 있겠지만, 목회하는 데 많은 일을 해줬다. 서로 많이 사랑하고 축복한다. 송윤면 이사가 영등포중앙교회 담임으로 내정됐다는 의혹은 무엇인가“후임자는 생각도 못 하고 있다. 갑자기 총장이 됐다. 후임자 얘기도, 생각도 할 때가 아니다. 교인들조차도 담임목사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9인 이사회에서 송 이사가 나왔지만, 담임 내정과는 상관없는 일이다.”최우선으로 풀어갈 과제가 있는가“신뢰와 사랑이다. 계속해서 만나고 함께 기도 해나가려 한다. 성도의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위로하고, 용서하고, 감싸 안고, 화합해 상처를 서로 치유해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 감신대는 부족한 게 없다. 단 ‘거룩한 사랑’, ‘용서와 화해’가 없다. 이를 찾아야 한다.”당부가 있다면“인간의 말, 수단으로 풀어낸다면 100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안 된다. 신학이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교리보다 더 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존 웨슬리 목사는 교리를 초월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예찬했다. 나도 평생 설교자의 사명과 기쁨으로 살았다. 존 웨슬리의 설교 한 편에서 지은 시를 나누고 싶다. ‘말 많은 논쟁은 늘 지치게 한다. 온갖 이론과 학설과 교파도 헛되어라. 당신께만 길과 진리 생명 있고, 당신의 사랑만이 내 마음을 비추이니, 거룩한 가르침에 하늘을 날아 당신 안에 마음 모으고, 당신 안에 하나 되어 살고 지고.’”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SNS 팔로워가 84만 명 이상 될 정도로 유명해진 크리스천 훈남 변호사 장천. 모든 의뢰인들에게 공평하게 좋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멀티탭 변호사'를 꿈꾸고 있다(현재는 법무법인 혜 소속 변호사). 요즘 연예인 못지않은 일반인 인기인들이 뜨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다양화된 방송매체 덕분이다. 감리교인 장천 변호사(32)는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변호사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무려 84만 6천 명으로 웬만한 연예인 부럽지 않다.그가 이렇게 유명해진 건 얼마 전 종영한 예능프로그램 ‘하트시그널’에 출연한 덕분이다. 이 프로그램은 일반인 남녀 8명이 한 달 동안 같이 지내면서 생긴 일을 다룬 리얼리티 프로그램인데, 당시 그는 부지런히 실시간 검색어 상단을 차지했다. 장천 변호사는 이 프로그램에서 ‘멀티탭남’이란 별칭을 얻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며 여성들에게 인기를 모으자 ‘모든 전자제품에게 똑같이 전원을 공급하는 멀티탭 같다’고 한 것. 그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것 자체가 뜻밖이었다고 한다. 장 변호사를 유명하게 만든 리얼리티 프로그램 '하트시그널' 포스터.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상대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고루 인기를 얻어 '모든 전자제품에 평등하게 전원을 공급하는 멀티탭 같다'는 별명을 얻었다(맨 왼쪽에서 두 번째).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여기까지“그 전까지 전혀 제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한 번도 방송에 출연한 적도 없고요. 제작진에게 어떻게 저를 뽑았냐고 했더니, 검색어 상단에 제가 나오더랍니다. 다른 변호사들은 방송 한 번 나가려고 애써도 잘 안 되는데요. 하나님의 은혜죠.”장 변호사는 다니는 교회(인천 예일감리교회: 담임 박상철 목사)에서 무료 법률봉사를 하고 있다. 아버지 장이우 권사는 세무사인데, 역시 같은 교회에서 세무 상담을 무료로 해주고 있다. 이런 아버지와 아들을 보며 가장 기뻐할 사람은 어머니 한숙경 권사.“우리 가족은 모두 다 어머니의 덕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께서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셨어요. 예전엔 아버지가 어머니 수요예배 나가시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더 열심히 교회를 섬기세요. 성가대장으로, 또 찬양 인도자로 봉사하십니다.”어려운 시절도 있었다.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 두고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가세는 많이 기울어졌다. 비만 오면 물이 새는 집에서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무사가 된 이후로는 불황의 시절에도 수입이 줄어든 적이 없다. 집에 있는 기도실에서 매일 새벽 밤으로 기도하는 어머니 덕으로 모두 고백한다.“제가 변호사가 되고 동생이 의사가 된 것도 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죠. 기자나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마음을 바꿔 변호사를 꿈꾸며 로스쿨 시험 준비하면서 사실 좀 불안했어요. 예상 점수가 합격선에 미치지 못하는 거예요. 기도를 많이 했죠.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그날도 시험을 앞두고 공부 중이었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다. ‘갈 수 있다, 너는 갈 수 있다.’ 그 음성을 듣고 그는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불안을 떨쳐버리고 마음에 큰 위로와 확신을 얻었다. 본 시험에 합격한 그는 이후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학비로 200만원 밖에 내지 않았다. 보통은 한 학기에 1천만 원이 들어간다고 한다.“합격 소식을 듣고 당연히 어머니가 우셨죠. 변호사 시험 합격했을 때도 우셨어요. 매년 3천 명 정도가 시험을 보는데 절반이 떨어지죠. 그때도 불안했어요. 제가 벼락치기 스타일로 공부해서, 학교 시험과는 달리 범위가 넓은 변시 때는 걱정이 됐는데, 붙었어요. 어머니가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어린 시절에 동생과 함께 장난하고 있다. 동생은 의사로 지금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있다. 받은 은혜 나누는 변호인 되고파내 실력만으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알기에, 그는 받은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또 이것이 로스쿨의 정신이라고 한다. 이전에 사법고시로 변호사가 됐을 때는 그 수가 너무 적어서 변호사를 선임하는 비용이 수천만 원씩 들기도 했다. 로스쿨의 취지는 일반 서민들도 법률적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그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법률 봉사도 하는 것이고요. 국선변호사도, 전담변호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많이 맡으려고 합니다. 보통 변호사들이 일 년에 국선을 두세 번 정도 하는데요, 저는 높은 비용을 받지 않는 국선을 좀 더 많이 하고 싶어요.”요즘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젊은이들이 교회가 ‘돈을 밝힌다’며 비판하는 게 안타깝다. 그 자신도 로스쿨을 다니면서 집을 떠나 있을 때 다닌 교회에서 실제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법률가로서 그가 할 수 있는 봉사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변호사가 TV 방송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화려한 모습과는 다릅니다. 그런 모습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있을까요. 매일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밤샘할 때가 많아요. 또 송무변호사로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 받는 일들도 많고요. 돈도 생각처럼 그렇게 많이 벌지 않습니다. 대기업 직원 정도예요. 앞으로 변호사가 더 많아질 것이니까 점점 더 그럴 겁니다. 그래서 돈을 벌려고 들어오면 실망합니다.”사법고시에서 로스쿨로 변호사가 되는 길이 달라진 것처럼 변호사가 되려는 사람도 왜 내가 변호사가 되려 하는지, 그 길을 분명히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 ‘변호인’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속물적인 변호사가 점점 변호사다운 변호사로 변화되는 그 모습을 늘 기억하고 싶다. 크리스천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장 변호사는 현재 교회에서 무료 법률 상담을 해주고 국선 변호인도 가급적 많이 맡을 생각이다.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제 의뢰인들이 진짜로 고마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가장 보람되죠. 억울하게 큰 벌금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던 분들이 좋은 결과를 받고 진심으로 감사해주시면 정말 뿌듯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의뢰인들은 너무 비합리적으로 나오고 힘들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제 감정을 빼버리고 사무적이 돼버립니다. 사실은 감정이 들어가서 의뢰인을 정말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변호사는 좋은 글이 나오고 좋은 소송이 되거든요. 그래서 소송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변호사와 진심어린 소통을 하는 게 좋습니다.”힘들 때마다 짧게라도, 차 안이든지, 어디서든지, 기도하며 위로를 얻는다. 밤 12시면 스마트폰 앱으로 오는 성경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 주신 말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엡 3:20-21)를 외우며 힘을 얻는다.“요즘 드는 생각은 제가 너무 어려울 때나, 아니면 뭘 바라는 게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하나님을 정말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하다 벌 받지 않을까, 혼나지 않을까, 문득 생각을 많이 합니다. 힘들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항상 하나님을 찾고 교제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로스쿨의 정신처럼 더 많은 이들이 법률 서비스를 받도록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그는 더 이상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멀티탭 훈남’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누구에게나 좋은 법률 서비스를 공평하게 공급하는 ‘멀티탭 변호사’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좋은 변호인으로 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