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함께’는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 20주년을 맞아 2차 송환을 준비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고 있다. 37년 동안 옥살이를 한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선생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비전향 장기수 양희철 선생. 고난함께 제공.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선생의 삶이란 무엇인가.

전쟁이 처음 일어났을 땐 나도 철이 없을 시절이라 지붕 위에 올라가서 구경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형은 북으로, 나는 남쪽 부산으로 나뉘어 이별을 하게 되었다. 부산에 살며 여러 일을 하다 지인의 소개로 한국은행에 들어갔고, 이후 군에 입대했다. 전역 후 돈암동에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예상치 못하게 형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근처에 살던 사촌 누이동생이 찾아와 “귀한 사람이 왔으니 가서 만나보자” 했다. 나갔더니 약속 장소에 형님이 나와 있었다. 형님은 내게 ‘일본에서 왔다’고 이야기했는데 아무리 봐도 형님이 ‘일본’에서 온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형님에게 ‘평양에서 왔지요?’하고 물었다. 그리고 형님이 돌아갈 때 나도 데려가 달라 부탁했다. 

1주일 후 다시 만나 충청남도 서산 백사리로 갔다. 그곳에서 북의 배를 타고 평양으로 가게 되었다. 이후 평양에서 살다가 남쪽으로 다시 내려와서 대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의 통일은 평화적·자주적·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함께 일하던 동지의 간첩신고로 인해 37년 간의 옥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37년의 옥중 생활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당국에서는 가족들의 면회를 통해 전향 공작을 하기도 했고, 교도소 측은 재소자를 선동해서 전향하지 않게 하는 ‘말썽꾸러기’ 5명을 지목하여 따로 수감시키고, 수시로 때렸다. 뒤로 수령을 채워 목까지 묶어 거꾸로 매달아 돌리는 ‘헬리콥터’라는 가혹행위도 있었다. 당하고 나면 살갗으로 피가 다 올라왔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감옥에서 겪는 가장 큰 설움은 배고픈 설움이다. 아주 적은 양의 식사를 하다 보니 수감자 대부분이 영양실조로 인해 고혈압, 피부 괴사 등의 질병을 앓는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소장 면회’를 걸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그렇게 소장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감옥 내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 그렇게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운동을 하니 수감자 모두의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두들겨 맞지 않으니 마음도 편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함께 고생했던 옛 동지들이 간절히 그립다.

 

출소하신 지 벌써 21년이 흘렀다. 오랜 시간 송환을 염원했던 만큼 2차 송환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실 것 같다. 2차 송환을 준비하며 드는 소회는 어떠한가.

지난 1차 송환 당시 63명의 비전향자를 북으로 보냈다. 나도 비전향이었기에 송환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가지 못했다. 출소 후 결혼을 하게 되었고, 정부는 ‘북으로 가게 될 경우 가족을 데려갈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기에 나는 또다시 이산가족이 되어 생이별을 겪을 수 없어 소환을 포기했다. 내게는 북조선도, 남조선도 모두 조국이다. 

그런데 나는 내 조국에서 자국민으로서의 처우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방인으로 37년을 감옥에서 지옥을 경험했다. 그리고 출소 후 21년이 흐른 지금, 북에는 생사를 알 수도 없는 가족들이 있고, 남에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북의 가족을 만나려면 남의 가족과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현실이 애달플 따름이다. 

 

북에 가게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북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 큰 형님이 1916년생인데, 살아있다면 벌써 100세가 넘은 연세다. 아마 형님을 다시 만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카들을 만나 살아생전 형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또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동지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감옥에서 함께 생활했던 1차 송환자들, 특별히 63명의 송환자를 대표했던 김동진 선생. 그분들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가울 것 같다. 그들을 만나 실컷 울어도 보고, 웃어도 보는 상봉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에서 하고자 했던 것’을 하고 싶다. 니는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출소 후 사회생활을 했다. 남쪽에서 큰 복을 누렸다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겪었던 좋은 면만 모아 북에서 이야기하고, 가능하다면 책으로 적어보고 싶다.
내 나이가 올해 87세다. 고령인 셈이다. 그곳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내 욕망대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이가 많고 정신력이 많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으로 갈 수 있다면 꼭 이루고 싶은 꿈이다. 더 건강이 악화되기 전에 북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송환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는가.

양심수후원회와 고난함께 등 시민단체들은 그간 많은 애를 썼다. 다만 정부의 의지가 문제다. 작년 올해만 해도 5~6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돌아가셨다. 생사를 넘나드는 동지들이 또 있다. 그들도 돌아가시고 나면 송환 대상자는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빠른 시일 내에 2차 송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이를 위해 통일부와의 접촉, 대통령 면담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정부의 의지를 불러일으켜야 하며, 인도주의적 접근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는 남북관계를 이루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체제 속에서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미국의 입김을 걷어내야 한다. 대한민국의 자주적인 정치가 필요하다. 

‘고난함께’를 통해 만난 분들 모두가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해주었다. 그 누구도 나를 죄수로, 고루하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이방인으로 대하지 않았다.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또한 관과의 접촉, 기자회견 등에 항상 관심을 가져준 이들이 바로 ‘고난함께’다. 함께 동지로서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커다란 힘이다. 통일을 위해 신앙인으로서 해주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바로 영적인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언젠가 통일이 될 것이다. 나의 세대에 이루어지지 못할지라도, 분명 통일은 이루어진다. 이 진보의 법칙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우리는 그날을 향해 오늘의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도 열심히 동참해주었지만, 2차 송환과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주길, 힘을 보태주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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