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흥도 목사(농촌선교훈련원)

▲ 차흥도 목사(농촌선교훈련원)

교회가 사회의 등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가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개독교’니 ‘먹사’니 하는 말들을 들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한 ‘8.15 광화문 집회’ 이후로 ‘신천지 못한 교회’라는 오명을 듣는 수준에까지 오게 되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이것 또한 현실이니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오죽하면 보수적인 예장 합동의 총회장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을까 싶다.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교회가 예배를 존중히 여긴 만큼 이웃의 생명도 존중히 여겼어야 했는데, 교회는 신앙의 자유와 현장 예배만을 강행함으로써 국민에게 거부감을 주고 교회를 등 돌리게 한 면이 있다, 더구나 일부 교회가 코로나 감염의 진원이 됨으로써 국민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교회는 사회의 등불이 될 수 있을까? 현재의 상태로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교회가 사회의 등불이었던 적이 있었다만 지금도 길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하면 사회의 등불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회는 교회에 엄청난 것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돈이 주인이 되어버린 이 물질주의 사회에 더욱 윤리적인 모습을 원하고 있다.  세습하는 교회와 목회자가 아닌 청빈한 목사와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더 가지려고 애쓰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자신을 나누고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즉 교회만을 위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교회로 거듭나기를 원하고 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눅 10:29)라는 질문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눅 10:36)는 주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교회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기보다는, 교회는 지금 아파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자들의 이웃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사람들, 영육 간에 너무 힘들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 사회적 편견 때문에 사람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있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특히 사람대접을 못 받고, 소외되고 배제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주의 사랑과 자비를 전할 때(눅 10:37) 비로소 교회는 사회의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이 편견 때문에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생명의 농업에는 병해충을 죽이는 농약을 쓰지 않고 건강한 밭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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