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주 목사(너와나의교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13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14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15 사도행전 3장 13~15절

 

유흥주 목사(너와나의교회)

근대 전쟁 역사까지 ‘척후 병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척후 병사는 본진 주력부대가 도착해 전쟁을 끝내기 앞서, 적의 진지에 먼저 가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주로 하는 병사다. 

척후 병사는 때에 따라 전쟁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 즉 적의 전력이 강할 경우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한 ‘심리전’을 수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 중 여리고성 전쟁에 등장하는 정탐꾼들이 이에 해당된다. 

현대 미국의 중동전쟁은 이런 묘미가 없다. 인공위성과 무인기에 의해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미국 본토 공군기지에서 발진(發進)한 전략폭격기, 미 태평양 함대의 미사일과 전투기들은 오락실 게임기처럼 손가락으로 전쟁을 하는 느낌이다. 

여리고성에 들어갔다 기생 라합의 극적인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정탐꾼들에 대한 이야기는 애굽과 광야에서의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시켜주는 심리적 효과가 더해져 대면하기도 전에 간담(수 2:24)이 녹아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아브라함이 꿈을 안고 세상에 나아갈 때 나이는 칠십이었다. 요셉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서 어릴 적 꾼 꿈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의 자리는 어떠한가.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를 안고 무덤에 있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일으켜 세워 꿈을 현실로 만드셨다. 부활하셨다. 너와 나,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크리스천에게서 꿈과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정의했다. 일제의 탄압 한복판에서 한반도 3천만 민중의 꿈은, 상동교회 청년이었던 김구의 꿈은 독립이었다. 김구는 “하나님께서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독립이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묻는다. 부활의 증인 된 여러분은 태어나면서 장애의 굴레, 가난과 무지의 굴레, 다름과 차별의 굴레에서 해방되셨습니까? 아직도 그것들이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하는가? 아직도 그것들이 당신이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인가? 그럼 당신에게 부활은 무엇인가? 그저 당신은 죽어서 가는 천국을 바라보며 방치된 불행한, 무기력한 인생인가? 

부활은 죽음과 죄의 구속에서 너와 나를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죄와 죽음의 속박 가운데 사는 이들은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죄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곧 죽을 인생이기에 그렇다. 죄인에게 기다림은 없으며 남의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든다. 약속을 이뤄줄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심리전을 준비하는 ‘척후 병사’에 지나지 않다. 그저 그곳에 가서 보고 체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전하는 역할만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어진 역할을 넘어서고 개입한다면 그것은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되고 율법이 될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너와 나의 정체성과 역할의 정의했다. 변호인도, 검사도, 더욱이 재판장도 아닌 우리는 본 것만을 이야기하는 증인이다. 그리고 보지 않은 것 이상을 이야기하면 위증(僞證)이 되어 벌을 받는 사람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척후 병사’의 임무는 교전해 적을 섬멸하는 ‘전투 병사’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가 어려운 것은 증인이 아니라 변호인, 검사, 재판장의 역할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척후 병사가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전투 병사가 되려 한다면, 적은 척후 병사를 섬멸하고 본진의 상륙을 막아 버릴 것이다. 전쟁이 어렵게 되어 많은 피해를 낳을 것이다.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증인의 참된 역할은 본진이 곧 와서 식민지 주민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다. 해방의 희망을 갖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을 독려하는 것이다.

때론 증인으로서 척후 병사의 역할로 인해 이미 본진이 도착하기도 전에 적은 퇴각 하여 전쟁이 끝나는 경우도 많다. 재판장의 판결이 있기도 전에 합의 하거나 재판을 포기해 끝나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진정한 증인인가? 

여기서 한가지 더 확인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증언의 내용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삶으로 체험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한 비결이 증언 내용인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서 성공한 비결을 신앙 간증처럼 나누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는 세상에서 희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상처를 준 세상의 논리로 부활을 대신하고 영혼들을 내쫓는 우를 범하는 죄악이다. 이제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이 더 이상 원수에게 두려움과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Power of God)이 아니다. 부활, 본질이 빠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절망적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아니다. 그래서 가슴 벅차오르는 환희와 헌신이 아니라 도덕적 덕담과 인간의 경험만이 존재하는 종교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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